[3월] 음악 탐구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왈츠 가문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Strauss II, Johann

1825~1899

 

슈트라우스가 없는 빈은
도나우 강이 없는 오스트리아와 같다.

- 베를리오즈

 

  • 왈츠 가문, 슈트라우스

왈츠(Waltz)는 3/4박자의 경쾌한 무곡으로, 1780년대 빈에서 크게 유행하여 19세기 유럽 전체로 널리 퍼진 음악의 한 장르입니다. 왈츠라는 용어는 독일어의 waltzen(구르다, 돌다)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프랑스 프로방스의 옛 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왈츠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슈트라우스(Strauss)인데, 이는 작곡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고 또 가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왈츠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또 「라데츠키 행진곡」의 작곡가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 I, 1804~1849)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왈츠 작곡가로 이름을 날립니다. 장남이 바로 ‘왈츠의 왕’이라고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II, 1825~1899)입니다.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빈의 실용적인 춤곡의 새로운 전통을 창시했고, 아들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에게서 빈 왈츠를 인계받아 최고도로 발전시켰습니다.

슈트라우스 1세의 둘째 아들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f Strauss, 1827~1870)도 작곡가였으며, 막내아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Eduard Strauss, 1835~1916) 역시 작곡가였습니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3세(Johann Strauss III, 1866~1939) 또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Johann Strauss I- Radetzky March

 

  • 아버지의 바람기가 아들을 음악가로 만들었다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여관업을 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계모는 그를 제본소의 도제로 보냈는데, 그는 제본을 착실히 배우면서 틈틈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습니다. 1822년 제본 일에 장인이 되었으나 1824년부터 왈츠 작곡가 란너(Josef Lanner, 1801~1843)가 결성한 사중주단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가고자 결심했습니다. 1825년 21세가 된 슈트라우스는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Maria Anna Streim)과 결혼하여 첫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낳았고, 자신의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들이 음악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고 은행원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834년부터 에밀리에(Emilie Trampusch)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되자 마리아는 아들들의 음악적 소질을 마음껏 개발하게 됩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35년 궁정 무도회의 지휘자로 취임하는 등 빈 지역의 대중음악을 지배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인기를 모았지만, 1849년 45세의 나이로 성홍열 때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빈 왈츠의 아버지’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슈트라우스가 없는 빈은 도나우 강이 없는 오스트리아와 같다.”

Johann Strauss II - The Beautiful Blue Danube

 

  •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사망 원인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첫 번째 부인에게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등 3명의 아들과 딸 둘을 얻었지만 1884년 이혼했습니다. 그는 곧 바로 재혼했습니다.

그런데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어른들은 좀처럼 걸리지 않는 병인 성홍열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그것도 재혼한 후처와의 사이에서 난 딸이 학교에서 옮은 성홍열 병균에 옮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 왈츠의 왕요한 슈트라우스 2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6세 때 이미 36마디로 된 왈츠를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치려 하지 않자 어머니가 몰래 아들에게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게 했습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들 요한 슈트하우스 2세가 음악가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상업학교에 입학시키고 은행에 취직시켰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44년 18세 때 공개연주 허가증을 받고 15명으로 구성된 악단을 구성하여 최초의 무도회를 열었는데 평판이 대단히 좋았습니다. 다음해 아들은 아버지 몰래 자신의 악단을 조직하여 아버지에게 도전하여 결국 아버지에게 이기고 맙니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경쟁했으나, 1846년 화해했습니다. 1849년 24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두 악단을 통합하여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명성을 높였습니다. 30세 때는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 있는 페트로포로프스키 공원의 하기 연주회 지휘자로 10년간 계약을 맺습니다. 1863년 38세 때는 과거 아버지가 차지했던 오스트리아 궁정 무도회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1872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프로이센-프랑스 간의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1만 명의 오케스트라, 2만 명의 합창단, 100명의 부지휘자를 동원한 대규모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500여 곡의 왈츠곡을 비롯하여 「박쥐」 「집시남작」 등 16개의 오페레타가 있습니다. 그는 간결한 관현악법을 통해 경쾌하고 친밀한 음악성으로 대중의 오락성에 맞도록 했고, 건강한 감각을 왈츠에 담아 왈츠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Johann Strauss II - Die Fledermaus Overture

 

  •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요한 슈트라우스 2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당연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러시아 연주여행 때 어느 부인이 그가 묵는 호텔에 매일 큰 꽃다발을 보냈기 때문에 그 부인의 남편이 슈트라우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그러자 슈트라우스는 그 사람을 자신의 호텔로 데리고 가서, 꽃이 가득 찬 4개의 방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중에서 당신 부인의 꽃이 어느 것입니까?”

슈트라우스 2세는 1862년 가수 트레프츠(Jetty Treffz)와 결혼했으나 얼마 후 사별했습니다. 1878년 30세 연하의 여배우 디트리히(Angelika Dittrich)와 재혼했으나 순탄한 생활을 하지 못해 나중에 이혼 절차를 밟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이혼을 허가하지 않자 1887년 국적을 독일의 한 공국인 작센(Sachsen)으로 바꾸고 아델레(Adele)와 세 번째 결혼을 하여 행복한 만년 생활을 하다가 1899년 74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Johann Strauss II - Voices of Spring Waltz

[2월]음악 탐구

성자 같이 살다 간 브루크너 - ②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Anton Josef Bruckner,

1824~1896

 

말러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은 작곡가이다.

- 브루노 발터

 

 

  • 바그너와 브루크너

 

1863년 이전까지만 해도 브루크너는 능력은 있으나 특징이 없는 작곡가였습니다. 1863년 그는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듣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바그너의 천재성에 완전히 압도당해 자신도 교향곡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3개의 미사곡과 교향곡 제1번 다단조(1865~1866)를 쓰던 1860년대 중반에는 수많은 바그너 음악 연주에 참가했고, 또 이 거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본격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1881~1883년 사이에 작곡한 교향곡 제7번이었습니다. 브루크너는 이미 60줄이었습니다. 이 곡을 작곡할 무렵 바그너는 건강이 악화되어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평소 바그너를 존경했던 브루크너는 제2악장(아다지오)을 바그너를 위해 느리고 슬픈 느낌이 나도록 곡을 쓰고 있었는데, 브루크너가 제2악장의 클라이맥스, 즉 심벌즈를 치는 부분의 음표를 적을 때 바그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1883년 2월 13일이었습니다. 아마도 브루크너는 매우 슬펐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루크너는 자신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에서 자주 사용했던 악기이자 바그너의 이름을 딴 악기인, 바그너 튜바(Wagner Tuba)를 악기 편성에 포함시켰습니다. 브루크너 교향곡에는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바그너 튜바를 비롯해 관악기의 중요성이 큽니다. 바그너와 그의 동시대 작곡가인 브루크너, 그리고 바그너의 제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외에는 튜바를 사용하는 작곡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튜바는 점차 현대 오케스트라에서 정규 악기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바그너 튜바는 기다란 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벨은 위쪽에 있고 약간 구부러지고 호른처럼 왼손으로 밸브를 조작합니다. 바그너 튜바는 바그너에 의해 처음에는 콘트라베이스 튜바로 명명되었다가, 후에 바그너의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Bruckner - Symphony No.7 (2nd movement)

 

  • 하느님을 사랑한 작곡가

 

브루크너의 마지막 교향곡인 제9번은 1891년 67세에 시작했는데, 표제는 ‘사랑하는 하느님에게(To God The Beloved, Dem lieben Gott)’였습니다. 3악장까지 완료한 것은 1894년이었고 마지막 악장은 결국 건강 악화로 미완성인 채로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에 대한 봉헌을 끝내지 못한 채, 하기 좋은 말로 제9번의 덫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브루크너는 72세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교향곡 제9번은 1903년 빈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브루크너는 하느님을 섬기며 구도자와도 같은 길을 선택한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교향곡에는 오르간 파트가 없는데도 그 울림이 왠지 오르간처럼 들린다는 평을 받는데,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그의 음악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배어 있습니다. 작곡가로서 브루크너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나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습니다.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교회의 오르간 아래 그의 무덤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브루크너는 여기서 합창단원으로, 나중에는 오르가니스트로 일했고, 이 오르간 아래에 묻혔다.”

 

Bruckner - Symphony No.9

 

  • 에피소드 1

 

브루크너는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럴 틈이 없다. 지금은 교향곡 제4번을 작곡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여유가 없다.”

 

 

  • 에피소드 2

 

빈 음악원 교수로 재직할 때 브루크너는 불협화음(Dissonance)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음은 정원(庭園)이다. 틀림없이 하나의 정원이다. 협화음(Consonance)은 그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이다. 그런데 정원에 갑자기 염소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하자. 그 경우 정원사는 틀림없이 막대기를 들고 그 염소의 머리를 때릴 것이다. 그때 정원에서 들리는 소리가 바로 불협화음이다. 알겠나?”

 

  • 에피소드 3

 

뮌헨의 어느 비평가가 브루크너의 한 관현악 연주를 듣고 다음과 같이 비평했습니다.

“브루크너의 작품은 괜찮은데, 너무 길어.”

이에 대해 브루크너를 좋아했던 막스 레거(Max Reger, 1873~1916)는 역으로 대꾸했습니다.

“브루크너가 너무 긴 것이 아니라, 당신의 비평이 너무 짧소!”

 

 

  • 에피소드 4 ‘아다지오 콤포니스트’

 

브루크너는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면서 어린아이와도 같은 천진무구함으로 일관했습니다. 일상생활은 물질욕 없이 검소했고, 헐렁한 옷을 입고, 머리를 항상 짧게 깎고 다녔으며, 시골 사투리를 썼고, 아는 것이 많은 도시인들을 항상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교향곡도 대체로 제1악장에서부터 규모가 크고 장중하지만, 느리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브루크너에게 사람들은 ‘아다지오 콤포니스트(느릿느릿한 작곡가)’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이유는 소년 시절 사랑했던 소녀를 잊지 못해서였다고 합니다(정말 소년 시절을 잘 보내야 합니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지만, 그의 유언대로 장크트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밑에 누워 있습니다.

 

Bruckner - "Adagio" from the String Quintet in F Major (arr. for String Orchestra)

 

[1월] 음악탐구

성자 같이 살다 간 브루크너 - ①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Anton Josef Bruckner(1824~1896)

말러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은 작곡가이다.

- 브루노 발터

 

 

  • 사후에 더욱 높이 평가받는 브루크너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Anton Josef Bruckner, 1824~1896)는 동시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세자르 프랑크와 여러 모로 닮았습니다. 작곡가 사후에 한층 더 높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프랑크와 브루크너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브루크너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Schlesinger, 1876~1962)는 브루크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러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은 작곡가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하면서 자신을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오르간 밑에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주님의 성전에 묻히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루크너의 미완성 교향곡 제9번 악보 첫 페이지에는 ‘사랑하는 하느님에게’라고 적혀 있습니다.

 

Bruckner Symphony No. 9

 

* 부천 필하모닉 지휘자 임헌정은 2007년 9월 브루크너 전곡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브루크너의 묘소를 찾아서 신고를 했습니다. 임헌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음악은 상상력에서 태어나는데, 상상력은 인간의 중요한 특권이다. 조용히 성당에 앉아 있으니 마치 그의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 늦게 출발했지만 더 멀리 나아간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는 세계 주요 국가에 브루크너협회가 생길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생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브루크너는 중국 사람의 행동이 느리다는 것을 의미할 때 쓰는 말, 즉 만만디(慢慢地)라는 단어가 꼭 어울리는 음악가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벽촌 안스펠덴(Ansfelden)에서 학교 교사 겸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곧 장크트 플로리안(St. Florian) 수도원 아동합창대원이 되었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음악을 본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은 것은 1851년 27세 때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가 되면서부터였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브루크너는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수도원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서 하나님에게 봉사했습니다. 교향곡이나 작곡법을 배우려고 제히터(Simon Sechter, 1788~1867) 선생을 찾아간 것도 그로부터 10년 뒤인 37세 때였습니다. 빈의 음악원 강사를 시작한 것은 1868년 44세 때였습니다.

1871년, 늦게 출발했지만 성실했던 브루크너는 47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열린 국제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등의 영광을 차지함으로써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1875년 브루크너는 51세에 빈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빈에서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리스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빈의 음악계는 브람스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 바그너를 따르는 진보파로 나뉘어 음악적 패권을 다투고 있었는데,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 1825~1904)라는 뛰어난 평론가가 보수파에 가담하여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고 있어서 브루크너는 음악적으로 별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바그너를 따르는 음악가 중에는 오만한 악동 후고 볼프까지 있어서 겸손한 브루크너도 도매금으로 한슬리크의 악평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지만 반 바그너주의자들의 반대와 적개심에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그의 교향곡이 “연주 불가”라며 거부하거나 일부러 연주를 망쳐버렸고, 영향력 있는 비평가이자 브람스 애호가인 한슬리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어떻게든 폄하하려 애썼습니다. 특히 교향곡 제3번은 브루크너가 자신의 영웅을 찬미하려는 열정적 의도로 현명치 못하게 ‘바그너 교향곡’이라고 이름 붙이는 바람에 더 신랄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브루크너는 인격적으로 매우 겸손하고 점잖았지만, 음악가 브루크너는 진보파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 1855~1922)와 프란츠 샬크(Franz Schalk, 1863~1931)가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공개 무대에 자주 올려 연주했습니다.

 

  • 브루크너의 「0번 교향곡」

브루크너는 자기 자신의 작품들을 매우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의 교향곡 가운데는 작품번호 0번이 있습니다. 연유는 이렇습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작품번호를 제1번부터 제9번까지 붙였는데, 어느 날 제1번보다 먼저 습작처럼 썼던 교향곡 악보를 서랍에서 발견했습니다. 다시 보니 그 작품도 괜찮다 싶어 그것을 1번으로 하려고 작정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미 통용되고 있는 작품번호가 하나씩 뒤로 밀려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제0번이라는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작품번호가 생겼습니다.

1863년 39세에 작곡된 이 작품은 「Study Symphony in f minor」라고도 하고 「Symphony No.00 in f minor」라고도 하는데, 브루크너가 사망한 지 28년이 지난 후인 1924년 초연되었습니다. 생전에는 그의 많은 교향곡들을 어느 악단도 연주해주지 않아서 브루크너 자신도 실제 공연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베토벤과 브람스에 이어 독일 교향악의 전통을 이어간 브루크너이지만, 브루크너의 작품들마다 여러 편의 판본이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브루크너가 워낙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고 또 귀가 얇아 친구들이 개작을 제안하면 자신의 교향곡 악보를 쉽게 고치거나 부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작품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뒤섞인 채 전해집니다.

Bruckner - Symphony in F (No. 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