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탐구

[8월] 음악 탐구

 슈만과 클라라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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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Schumann, 1810~1856          Clara Schumann, 1819~1896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제단에서 영원한 힘을 지닌 에로스의 찬란한 불꽃을 태운다.
- 에트빈 피셔

 

슈만이 공짜로 피아노를 연습한 방법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로이메라이’로 너무도 유명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이 학창 시절 한 친구와 프랑크푸르트에 여행을 갔는데, 돈이 없어 싸구려 여관에서 자고는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어느 악기상 앞을 지나갈 때 슈만은 갑자기 피아노가 치고 싶어서 그 악기점에 들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영국의 어떤 귀족의 부탁을 받고 피아노를 사러 온 사람입니다.”

당연히 악기점 주인은 슈만에게 피아노를 골라보라고 했고, 슈만은 서너 시간 손가락 훈련을 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슈만과 클라라, 돈보다 강한 사랑

1830년 20세의 슈만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감격한 나머지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모친의 승낙을 얻어 독일의 정상급 피아노 교육자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의 지도를 받아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슈만이 청년 피아니스트였을 무렵, 비크의 딸 클라라(Clara Wieck, 1819~1896)는 아홉 살 아래의 소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슈만은 손가락을 다쳐 연주자에서 작곡가로 전환하고는, 클라라에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차츰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슈만의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결코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클라라가 20세가 되던 해인 1840년 두 사람은 결혼 허가를 요청하는 소송을 법원에 신청했습니다. 법원은 이들의 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화가 난 클라라의 아버지는 심지어 딸에게서 상속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R.Schumann – Widmung <Myrthen, Op.25, No.1>

 

바그너와 슈만

리하르트 바그너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던 반면, 로베르트 슈만은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슈만은 바그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그너는 참으로 훌륭한 음악가인데다 위트가 있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말을 계속하지요. 정말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사람이 항상 말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반면에 바그너는 슈만을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그와는 도무지 의사소통이 안 돼요. 내가 파리에 갔다 왔을 때 그에게 들러 내가 파리에서 겪은 일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거예요. 정말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에요. 사람이 침묵만 하고는 살 수 없잖아요?”

이런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슈만이 라이프치히의 어느 술집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기쁘게 악수한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대화를 위해 친구가 몇 번 시도를 했으나 슈만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헤어질 때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에 우리 꼭 다시 만나서 오늘처럼 이렇게 서로 실컷 침묵하자구!”

 

R.Schumann –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슈만을 앗아간 유전병

슈만의 부친 쪽으로는 유전적으로 정신질환이 있어서 아버지가 정신병으로 사망한 데 이어 누이도 19세 때 자살했으며 슈만 역시 최후를 정신병원에서 맞이했습니다. 슈만을 괴롭혔던 환청, 환각, 망상 등의 이상체질과 격정에 빠지기 쉬운 과민한 기질이 오히려 변화와 다양성, 때로는 역설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적 예술 표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런 질병이 그가 남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든 간에, 한 인간에게는 불행을 안겨주는 비극이었습니다.

슈만의 부친은 서점을 경영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음악을 배웠고 9세 때부터 작곡을 했으며 14세 때는 꽤 솜씨 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풍부하게 한 덕분인지 슈만은 나중에 문필가로서도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23세 때 『음악신보』라는 음악평론지를 창간하고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두 가지 필명으로 날카로운 음악평론을 펴는 한편 새로운 음악가들을 발굴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쇼팽과 브람스를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한 사람이 바로 슈만이었습니다.

슈만의 나이 43세 무렵부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슈만은 언어 표현력이 떨어지더니 동작이 느려지고 때때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오케스트라나 코러스 단원들과 잦은 불화를 겪었습니다. 병세는 갈수록 심해져 라인 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했습니다. 1856년 슈만은 결국 정신병원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슈만의 작품은 고전주의 작곡가처럼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는데, 그중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작품 수가 많은 분야가 피아노 독주곡과 가곡입니다. 이 가운데 3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적 서정성이 담긴 낭만주의 향기가 풍기는 표제적(標題的) 음악입니다. 특히 가곡은 슈베르트가 개척한 리트 형식을 계승하고 거기에다 시와 음악을 밀착시켜 보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제노베나 Genovena」(1848), 교향곡 제1번 ‘봄’(1841), 교향곡 제3번 ‘라인’(1850), 피아노 협주곡(1845), 「사육제」(1835), 「어린이 정경」(1838), 가곡 「유랑의 무리」(1840) 등이 있습니다.

 

R.Schumann Cello Concerto in A minor, Op.129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 우정(?)의 편지

클라라 슈만은 슈만의 충실한 아내이자 여섯 아이들의 엄마, 그리고 재능이 풍부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1853년 2월,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청년이 바로 브람스였습니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스승의 아내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을 기울이게 됩니다.

6명의 아이들을 안고 7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브람스는 자신이 새로 작곡한 피아노 삼중주를 들려주었습니다. 클라라에게서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했습니다.

슈만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시작된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마음은 차츰 짙어만 갔습니다. 1855년 가을, 클라라, 요아힘, 브람스 등 세 사람의 합동연주회를 각지에서 개최하여 슈만 일가의 생계를 돕기도 한 브람스는 당시 클라라보다 열네 살 연하인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브람스와 클라라 사이에 서신왕래가 시작됩니다. 그후 40년에 걸쳐 음악사상 보기 드문 우정의 편지가 오고갔습니다. 편지에서의 호칭은 ‘경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 경칭의 ‘부인(Sie)’에서 친밀한 표현인 ‘당신(Du)’으로 변화해 가지만, 또한 ‘사랑하는 친구여’라는 우정을 지키려는 노력이 애처롭게 스며 있습니다.

두 사람의 편지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현실세계 속에서 클라라를 연모하는 브람스와 현실도피 차원에서 브람스를 생각하는 클라라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R.Schumann - (cello) Träumerei, "Kinderszenen" No. 7, Scenes from Childhood

R.Schumann - (piano) Träumerei, "Kinderszenen" No. 7, Scenes from Childhood

[7월]음악 탐구

음악의 귀공자 혹은 제2의 모차르트, 멘델스존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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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Mendelssohn, 1809~1847)

한여름 밤의 꿈을 들었네.

정말이지 자네의 음악과 같은 그처럼 완벽하게

셰익스피어적인 음악을 나는 여태까지 들어본 적이 없네.

- 베를리오즈

 

 

  • 멘델스존의 출생 비밀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 중 9번째 곡 ‘결혼행진곡’으로 너무도 유명한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정식 이름은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은 외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두뇌도 매우 비상했습니다. 멘델스존의 외모는 미모의 할머니 프롬체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할머니를 아내로 맞은 할아버지 모세(Moses Mendelssohn, 1729~1786)의 좋은 머리 덕택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멘델스존은 ‘독일의 소크라테스’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훌륭한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할 뻔했습니다.

모세는 독일의 가난한 유대인 율법학자 메나헴 멘델 데사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몸은 볼품없는 꼽추였으나 머리는 무척 좋아서 나중에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고,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모세 데사우라는 이름으로 통했지만, 글을 발표할 때는 ‘멘델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멘델스존’을 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함부르크에 있는 한 상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상인의 아름다운 딸 프롬체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외모상으로 두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나, 모세는 프롬체에게 당당하게 접근했습니다. 프롬체는 당연히 알은체도 하지 않았지만, 모세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습니다.

 

“아가씨는 운명을 믿습니까? 각자의 배우자는 주님께서 정해준다는 말을요.”

프롬체는 네까짓 게 하는 마음으로 차갑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주님은 서로 잘 어울릴 짝을 정해주시지요.”

모세는 즉각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남자가 태어날 때 주님은 아내가 될 여자를 미리 정해주시지요. 내가 태어날 때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잘생긴 사내아이지만, 아쉽게도 너의 아내는 곱사등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주님에게 빌었습니다. ‘안 됩니다. 저를 꼽추로 만들어주시고, 그 대신 나의 신부에게 아름다움을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프롬체는 마음을 바꾸어 모세를 다정히 쳐다보았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와 프롬체는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아브라함은 1809년 펠릭스 멘델스존이라는 잘생기고 머리도 좋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1. Mendelssohn - Wedding March (A Midsummer Night's Dream)

 

  • 저명한 아들 겸 저명한 아버지

멘델스존의 부친 아브라함은 사려 깊은 유대인 은행가로서 아마추어 음악가인 리어와 결혼했는데, 리어는 영문학과 불문학, 그리고 심지어 이탈리아 문학을 연구하던 인텔리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기억력에다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재기발랄하고 또한 폭넓은 교양을 가지고 삶을 사랑했으며, 사람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작곡가, 지휘자 혹은 피아니스트로서 멘델스존은 당연히 시대의 총아가 되었습니다. 멘델스존은 동시대의 작품뿐만 아니라 과거의 명작과 간과되었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이 다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J.S. 바흐의 음악을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멘델스존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멘델스존은 슈만의 새로운 작품들 초연하여 세상에 선보였고, 1839년 슈베르트가 사망한 지 10년도 더 지나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도 초연했습니다.

멘델스존의 부친 아브라함은 종종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과거에는 저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저명한 아들의 아버지이다.”

 

Bach-Mendelssohn Chaconne from Partita No.2 in D minor arranged for Violin and Piano

 

  • 멘델스존의 배려

어느 날,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실내악 콘서트에서 멘델스존은 자작의 피아노 삼중주 사단조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주회 시간이 다 됐는데도 악보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멘델스존의 기억력은 신화적인 것이었습니다. 대개의 연주자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어서 암보로 연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다른 피아노 악보를 가져다가 가끔 그것을 넘기면서 쳤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 바이올린 주자는 악보가 다른 것임을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멘델스존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네들 앞에서 암보로 피아노를 쳐서 점수를 따고 싶은 생각은 없었네.”

 

Mendelssohn Piano Trio No.1 in D Major, Op.49

 

  •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고, 음악성이 풍부한 연상의 누이를 두었습니다.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Nanerl)은 어릴 때부터 훌륭한 연주 솜씨를 보였던 피아니스트였고,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Fanny) 역시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로서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습니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멘델스존 역시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구사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여행을 많이 했고, 또 여행 중에 작곡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알다시피 모차르트는 35세에, 멘델스존은 38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굳이 다른 점 몇 가지를 예로 든다면, 모차르트의 부친은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 전역으로 연주여행을 다녔습니다만, 멘델스존의 부친은 연주여행을 삼가고 주로 집안에서 소규모 콘서트를 열어 파니와 멘델스존의 연주를 즐겼습니다. 모차르트는 온갖 음악 장르를 섭렵했지만, 멘델스존은 그림까지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멘델스존은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의 미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Felix Mendelssohn - Rondo Capriccioso, Op.14

[6월] 음악탐구

 

표제음악의 창시자 베를리오즈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베를리오즈

 (Louis-Hector Berlioz, 1803~1869)

 

그렇게 독특한 악기들의 조합을 통해

훌륭한 음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베를리오즈뿐이다

- 페티(음악평론가, 환상 교향곡을 감상한 후)

 

 

 

  • 가문의 기대를 저버린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Louis-Hector Berlioz, 1803~1869)는 의사인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당해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한바탕 시련을 겪습니다. 아버지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해부실에 들어간 순간 시체를 보고 도망쳐 나오고 말았습니다. 베를리오즈는 23세 때 어렵게 허락을 받아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악기라고는 어렸을 때 플루트와 기타를 조금 만져보았을 뿐이었으므로,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연극배우에 홀딱 반하다

24세 때 베를리오즈는 파리에 온 영국 극단의 「햄릿」을 관람하고는 오필리어 역의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말을 걸었으나 그녀가 상대도 해주지 않자, 베를리오즈는 몽유병자처럼 거리를 헤매는가 하면 파리 교외의 숲속으로 잠적하곤 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인 리스트와 멘델스존, 쇼팽 등은 그가 혹시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짝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그는 무대에서 그녀가 상대역 남자의 가슴에 안기기라도 하면 비명을 지르며 극장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와 같은 사랑의 아픔 속에서 그의 대표적인 표제음악 「환상 교향곡」이 태어났습니다.

마침 그 무렵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그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최종 악장 ‘마녀들의 밤의 향연의 꿈’에서 그녀를 마녀의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곡이 완성되자 곡을 들고 런던으로 가려는 베를리오즈 앞에 스미드슨이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베를리오즈의 부친의 반대 때문에 두 사람은 몰래 영국대사관에서 리스트의 입회 아래 결혼을 하고는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 환상 교향곡

‘어느 예술가의 생애와 에피소드’라는 부제가 붙은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 op.14」은 각 악장마다 ‘꿈-정열’ ‘무도회’ ‘전원의 풍경’ ‘단두대로의 행진’ ‘마녀들의 밤의 향연의 꿈’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5악장으로 구성된 이 교향곡은 서양음악사 최초의 표제교향곡입니다. 「환상 교향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는 절망하여 아편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살에도 실패한 그이의 머릿속으로 아편 기운을 따라 기괴한 꿈들이 거미줄처럼 얽힌다. 이런 식으로 일상의 모든 실패는 낭만의 한 단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낭만주의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만 욕망하기에, 그이의 모든 욕망들은 실패를 전제한다.”

이것이 「환상 교향곡」에서 베를리오즈가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입니다. 인간의 감정적인 내용들을 정확하게 음으로 전달하는 능력에 있어서 아무도 베를리오즈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악곡에 제목을 붙이는 ‘표제음악’을 창안한 점 또한 베를리오즈의 그러한 능력의 산물입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형식미보다는 제목이 품고 있는 줄거리와 감정들의 표현을 통해 생명력을 얻습니다. 베를리오즈의 또 다른 표제음악들인 「로미오와 줄리엣」과 「파우스트의 겁벌」도 청각적인 상상력이 일구어낸 탁월한 극적 교향곡들입니다.

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op.14 (Full Length)(57:33)

 

 

  • 음악평론가들로부터 외면당한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프랑스 대중을 즐겁게 해주긴 했지만, 당시의 음악가와 비평가들에게는 불쾌감을 유발했으므로 자신의 예술을 몰라주던 프랑스 악단과 마찰을 빚었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등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운명에 사로잡힌 천재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바그너와 함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우뚝 섰을 뿐 아니라 ‘표제음악(標題音樂, Program Music)’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의 유형을 창시했습니다. 표제음악은 ‘절대음악(絶對音樂, Absolute Music)’의 대립적 개념입니다.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인 「환상 교향곡」과 솔로 비올라에 의해서 표현된 「이탈리아의 해럴드」 등의 작품은 베토벤의 착상을 잇고 있습니다.

‘근대 오케스트레이션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베를리오즈는 악기를 잘 이해했고 그 음색과 효과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을 듣는 영광은 그가 타계한 후에나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Berlioz/Liszt - Symphonie Fantastique, “A Ball” op.14 (6:33)

[5월] 음악탐구

가곡의 왕 슈베르트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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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슈베르트에게는 틀림없이 숭고한 불꽃이 있다.
- 베토벤

 

• 괴테와 베토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슈베르트
  1816년 가곡의 왕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괴테의 시 28편에 붙인 곡을 괴테에게 보내어 그에게 이것을 헌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자기 작품에 음악이 붙는 것을 싫어했던 괴테는 이 작품집을 아무 응답 없이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주의는 건강이고, 낭만주의는 병이다.”
  아시다시피 베토벤은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였고, 슈베르트는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곡가였습니다. 
  슈베르트의 소원은 베토벤의 제자가 되는 일이었으나 그것은 생전에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1827년 3월 어느 날, 슈베르트는 자신의 친구의 안내로 베토벤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찾아가 베토벤에게 자신이 지은 노래 몇 곡을 보여주었습니다.
  베토벤은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들이군요”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수줍음이 많았던 슈베르트는 그 자리에서는 끝내 한마디의 말도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827년 3월 26일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했습니다. 또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828년 11월 19일, 슈베르트는 베토벤 곁에 묻혔습니다. 두 사람의 무덤은 빈의 중앙묘지에 나란히 있습니다.
  실제로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직접 만났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만, 슈베르트의 작품을 본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슈베르트에게는 틀림없이 숭고한 불꽃이 있다.”

 

• 슈베르트의 정중한 사과
  19세기 초 빈, 살롱 연주회에서는 슈베르트의 가곡과 춤곡이 단골 레퍼토리였습니다. 어느 날 슈베르트는 자신의 춤곡을 리허설하는 곳에 참석했습니다. 가만히 듣다가 가수의 템포가 엉망이라 한 마디 했습니다.
 “이곳은 조금 빠르게, 그리고 그곳은 조금 느리게 하십시오.”
그러자 지휘자가 연주를 중단하고 뒤돌아보며 화를 냈습니다. 
 “지휘자는 나요. 이 춤곡의 템포가 어떻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소!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원래 수줍음을 잘 타는 슈베르트는 일어서서 절을 하고는 나갔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그 춤곡의 작곡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슈베르트는 당시 가곡 작곡가로서, 그리고 피아노 춤곡과 연탄곡 작곡가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분야는 그때까지 아마추어의 영역에 속하는 소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후 가곡은 엄연한 예술로 인정받아 오늘날 슈베르트를 ‘가곡의 왕’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슈베르트의 춤곡과 연탄곡은 완전히 잊힌 장르가 되고 말았습니다.

 

• 연주하는 고생은 딴 사람이 해야지
  슈베르트는 피아노 연주도 뛰어났습니다. 한 모임에서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청에 따라 「방랑자 환상곡」을 연주하다가 마지막 악장에서 손가락이 잘 안 돌아가자 중단하고 일어서면서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Evgeny Kissin - Schubert - Wander Fantasy in C major, D 760

“이런 곡은 악마에게나 치게 해야지.”
가까운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거 자네 곡이 아닌가?”
슈베르트가 되받았습니다.
“내 곡이라고 꼭 내가 쳐야 한다는 법이 있나? 나는 작곡하느라 고생했으니 연주하는 고생은 딴 놈이 해야지.

 

• 슈베르트에게 마술을 건 마왕
  1815년 슈베르트는 덴마크의 전설을 바탕으로 1782년 괴테가 지은 이야기 시 「마왕 Erlkoenig」을 읽고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빠르게 곡을 붙였습니다. 반주까지 모두 작곡하는 데 겨우 1시간 남짓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18세 때 작곡한 이 곡은 슈베르트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초연은 당시 14세의 소년 가수가 불렀는데 앙코르를 2번이나 불렀습니다. 말이 질주하는 정경을 그린 음산한 3잇단음표의 전주로 시작되는 「마왕」은 해설자, 아버지, 아들, 마왕 등 네 사람의 소리로 분담하여 극적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아들의 소리는 긴장되고 높게, 마왕의 소리는 속삭이듯이 약하게 쓰였으며, 이 점이 이 노래의 재밋거리이자 동시에 부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또 오묘한 전조나 절묘한 화음을 사용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시와 선율과 반주가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예술가곡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시 한 평론가는 「마왕」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칭찬했습니다.
 “전성기의 바그너조차도, 18세의 슈베르트가 괴테의 이야기 시에서 실현한 극적인 클라이맥스보다 더 교묘한 클라이맥스를 구성할 수는 없었다.”

Schubert - Erlkönig(마왕)

 

• 동명이인 슈베르트
  박성민이라는 모창 가수는 가수 박상민과 외모와 목소리가 매우 닮았습니다. 그래서 박성민이 소위 밤무대에서 박상민 행세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최근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클래식 음악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애호가를 사귄다든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재주가 없어서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출판업자를 찾는 데도 어려움이 많아 친구들이 대신 주선해주곤 했습니다.
1815년 친구들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괴테의 「마왕」을 라이프치히에 있는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로 보냈습니다. 당시 라이프치히에는 드레스덴 궁정악단의 단원이자 교회음악 작곡가였던 프란츠 안톤 슈베르트(Franz Anton Schubert, 1768~ 1824)라는 작곡가가 있었는데,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는 이 사람에게 그가 작곡가인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드레스덴의 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은 화를 불같이 내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마왕」이라는 칸타타를 작곡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작자가 내 이름을 도용하여 졸렬한 작품을 썼는지, 이 작자를 꼭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 슬픈 예술가의 초상, 슈베르트
  아름다운 선율로 만인의 가슴에 위안을 안겨준 슈베르트의 일생은 슬픈 운명의 예술가의 초상입니다. 슈베르트는 1797년 빈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14남매의 13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슈베르트 가족은 부친을 비롯하여 모두 음악을 좋아했는데, 부친은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슈베르트가 다섯 살 때 초보 교육을 가르쳐주었고 여섯 살 때 학교에 넣었는데, 언제나 그는 수석을 차지했다. 여덟 살 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는데, 쉬운 이중주는 나와 함께 꽤 잘 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리히텐탈의 성가대 지휘자 겸 성가대장인 미하엘 홀처에게 배우게 했는데, 훗날 홀처는 눈물마저 글썽거리면서, ‘이런 학생을 가르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나는 이렇다 할 교육을 시킨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와 더불어 얘기만 나누어도 마음속으로 경탄할 뿐이었다.”
  1812년 25세가 되던 해부터 슈베르트는 빈의 궁정악장인 살리에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당시 살리에리는 62세의 노인이어서 그런지 그의 예술관은 전시대적(前時代的)인 것이었고, 슈베르트에게 큰 도움은 못됐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글루크의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는 모임을 만들고는 자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작은 연주회도 가졌습니다. 여름이 되면 시골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슈베르트는 겨우 31년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 짧은 생애에 가곡만 6백 곡 이상을 작곡했습니다. 오선지가 없으면 잡기장에도 쓰고, 헌 봉투에도 썼다고 합니다. 그가 일생을 통해서 얻은 보수는 57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미완성 교향곡」이나 「다장조 교향곡」은 그의 생전에는 연주되지 않았습니다.

Schubert symphony no 8 1st movement (D 759) (Unfinished)

 

이처럼 위대하고 아름다운 한 남성의 영혼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친 여성은 없었다고 합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 늦은 가을, 마치 보리수나무에서 한 입 낙엽이 떨어지듯, 한 마디 말을 남기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내가 죽거든 베토벤 옆에 묻어달라.”

 

슈베르트 즉흥곡 D.899 Op/90 2E플랫 장조

Schubert Sonata no.19 D.958

 

[4월] 음악탐구

음악의 성인 베토벤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음악탐구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만약 하나님이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서 귀를 앗아간 것이다.
-로맹 롤랑

 

  • 베토벤의 집중력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작곡을 했습니다. 베토벤이 어느 날 빈의 단골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베토벤은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두드리며 보이를 불렀습니다. 그런 후 (보이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 주머니에서 오선지를 꺼내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보이가 와서 자기가 잘 아는 이 손님이 작곡에 몰두해 있는 것을 보고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않고 슬며시 가버렸습니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난 뒤 오선지에서 눈을 뗀 베토벤이 외쳤습니다.

“계산서 가져와요!”

  베토벤은 늘 창작 작업에 너무나 몰두했기 때문에 자기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그를 아는 어떤 사람이 빈의 한 거리에서 그를 만났는데, 평소 외양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베토벤이 멋지게 차려입고 나선 것을 보고는 놀랐습니다. 사실은 베토벤의 외양이 너무 형편없어 그의 친구들이 손을 썼던 것이지요. 친구들이 저녁에 헌옷을 살짝 치우고 그 자리에 새 옷을 가져다 놓았던 것입니다. 베토벤은 다음날 아침 그 새 옷을 입으면서도 옷이 달라진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인 베토벤은 독일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서 초기 낭만주의 시대로의 전환기 사이에서 56년의 생을 보낸 베토벤은 고전파 음악 양식을 최정상까지 높이는 동시에 19세기 음악가들의 우상적 존재가 되었으며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곡가입니다.
  베토벤의 조부 루이스(Louis van Beethoven, 1714~1773)는 플랑드르에서 이주해온 본 궁정의 악장이었고, 아버지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은 본의 궁정 가수(테너)였으며, 어머니 막달레나는 궁정 요리장의 딸이었습니다.
  1770년 12월, 베토벤이 본에서 태어났을 때는 이미 신동 모차르트(1756~1791)의 명성이 전 유럽에 걸쳐 퍼져 있을 때였습니다. 신동에 대한 동경을 가진 베토벤의 아버지는 베토벤을 음악의 길로 안내했습니다.
  가문을 끔찍하게 중히 여기고 격식을 따지는 빈의 어느 귀족이 자기 딸의 피아노 선생으로 베토벤을 채용했습니다. 얼마 후 딸이 아빠에게 피아노 선생을 식사에 한번 초대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아빠는 깜짝 놀라며 거절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피아노 선생과 한 밥상에 앉다니!”

 

•괴테와 베토벤의 만남


  베토벤은 예전부터 괴테를 존경하고 있었지만 1809년 괴테의 「에그몬트」에 곡을 붙이면서 한층 더 마음으로부터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새로 작곡한 「에그몬트 서곡」을 바치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은 1811년의 일입니다. 이 편지는 현재 독일 바이마르의 괴테문헌보관소에 남아 있습니다. 
위대한 분께
저처럼 당신을 존경하는 한 친구가 급히 그곳으로 떠나는 길에 그에게 부탁하여 감사의 글을 보냅니다. 베티나 브렌타노는 당신이 저를 친절하게 받아주시리라고 했지만 제가 어찌 감히 그런 환대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곧 저의 「에그몬트」를 받게 되실 것입니다. 당신의 평가를 기대합니다. 어떤 비판도 최상의 찬사와 마찬가지로 저와 제 예술에 도움이 되오니 즐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1811년 4월 12일 빈
당신의 숭배자, 루트비히 판 베토벤 
L.v.Beethoven "Egmont" Overture, Op 84 ***연주영상 click

 

•괴테의 답장

당신의 우정어린 편지를 올리버 씨를 통해 받고서 아주 기뻤습니다. 당신이 저에 대해 표현하신 다정함에 감사드리고 저도 같은 마음임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작품을 들을 때마다 당신의 특별한 피아노 연주를 직접 보게 되기를 소망해 왔습니다.
베티나 브렌타노는 환희에 차서 당신에 대해 애정어린 말을 했고, 당신과 보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하더군요.
이제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당신의 「에그몬트 서곡」을 받아볼 수 있겠지만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벌써 여러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올겨울에 우리의 무대에 올릴 연극과 함께 그 곡을 연주할 계획입니다.
올리버 씨에 의하면 당신이 여행 중에 바이마르에도 방문할 것이라는 데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그때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제가 더 관심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괴테

 

•괴테와 베토벤의 이별

  괴테와 베토벤 두 사람은 1812년 여름 베토벤이 휴양하고 있던 테프리츠에서 만났습니다. 베토벤이 스물한 살 연배인 괴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의 시는 내가 고민 속에 있을 때도 나에게 행복을 주었습니다.”
괴테는 귀가 먹은 베토벤을 위해 말 대신 그의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는 그 이상으로 당신의 음악에서 기쁨과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베토벤과 괴테는 함께 공원을 거닐었습니다. 한 귀족이 마차를 타고 그들 곁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괴테는 신사답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답례를 하는데, 베토벤은 모자를 쓴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귀 때문에 마차 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세상 사람은 그것을 그 두 위인의 차이점이라고도 합니다.
  그후 괴테와 베토벤은 서로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됩니다(두 위인은 서로 계속 존경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괴테는 베토벤의 야인적인 태도를 혐오했습니다.
 “베토벤의 재능은 나를 놀라게 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야성적인 인물이다.”
베토벤 역시 단호히 말했습니다.
 “괴테는 궁정풍의 냄새가 나는 사람이어서 시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위대한 두 예술가는 그후로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왜 음악의 성인인가?

   흔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 모차르트는 ‘음악의 천재’, 그리고 베토벤을 ‘음악의 성인’ 혹은 ‘악성(樂聖)’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바흐의 작품은 기교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따뜻한 인간미로 넘치기 때문에 바흐를 ‘음악의 바다’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든은 108개나 되는 교향곡을 작곡했으니 그렇게 불러도 무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차르트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나 왜 사람들이 베토벤을 악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프랑스혁명(1789)의 혼란을 바로잡은 나폴레옹이 유럽을 개혁할 무렵인 1802년, 베토벤은 갓 스무 살을 넘겼습니다. 왕과 귀족의 지배를 끝내고 시민계급이 주도하는 시대를 환영했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위해 교향곡을 작곡하고, 표지에 ‘보나파르트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1804년 4월 7일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빈에서 초연된 이 교향곡은 역사상 유례없이 뜨거운 피가 흐르는 혁명적인 곡이었습니다. 점잖고 우아한 하이든과 감미로운 모차르트 스타일에서 벗어나 운명처럼 강하고 역동적인 음악이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1804년 5월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그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를 위하여’라고 쓴 겉장을 뜯어버리고 제목을 ‘영웅 교향곡, 위대한 인물에 대한 추억을 기리며’라고 바꾸어 썼습니다.
베토벤3번교향곡 영웅 Beethoven symphony 3 ***연주영상 Click

 

•프리랜서 작곡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등 이전 음악가들은 그들을 돌보아주는 귀족들에게 일종의 하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느 귀족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프리랜서로 활동했습니다. 베토벤은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예술가는 귀족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럽 정복을 위해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베토벤은 빈에 있는 리히노프스키 공작(Prince Karl Lichnowsky, 1756~1814)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은 프랑스 장교가 베토벤을 알아보고 공작에게 연주를 부탁했습니다. 무력으로 침입한 프랑스군에 대한 적대감이 넘치는데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베토벤은 그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과 같은 귀족은 수백 명이 넘지만 예술가 베토벤은 단 한 사람뿐이오.”
  혁명을 사랑했던 베토벤은 예술가의 위상을 높인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을 극복하고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 그를 우리는 ‘음악의 성인’, 즉 ‘악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Beethoven Piano Sonata No.17 3mov ***연주영상 Click
Beethoven "Pathetique" 3rd movement ***연주영상 Click

 

[3월] 음악탐구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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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천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자기들끼리 즐길 때는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할 것이다.
- 칼 바르트

 

 •초콜릿 상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
  초콜릿 포장지에 그려 넣으면 가장 잘 어울릴 작곡가는 누구일까요? 우선 엄숙한 바흐나 고뇌하는 베토벤의 얼굴은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텔레만이나 비발디는 초콜릿과 조금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초콜릿에는 단연 모차르트가 최고 아닐까요? 달콤한 초콜릿과 아름다운 선율. 갖가지의 초콜릿 모양과 모차르트의 다양한 음악. 초콜릿과 모차르트는 닮은 것이 많습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나 주로 활동했던 빈의 주요 선물 가게에는 모차르트의 얼굴을 상표로 하는 물건들이 많습니다만, 그중에서 초콜릿이 가장 많습니다. 

 

•모차르트의 장난기
  하이든의 행동에 익살과 해학이 배어 있다면, 모차르트의 행동에는 장난기가 가득합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오선지에 11개의 음으로 된 화음을 적어놓고, 이것을 피아노로 한꺼번에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점심을 사고 아무도 못하면 자기가 얻어먹어야겠다고 내기를 걸었습니다.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 모두 손가락이 10개밖에 없어 누구도 그 화음을 짚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양손으로 10개를 짚고 가운데 음은 코로 짚었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근거가 희박합니다).
  모차르트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가 사망한 후 그를 이어 궁정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루크가 연간 2,000굴덴을 받았던 반면, 모차르트는 겨우 800굴덴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빈의 궁정에서는 모차르트에게 별로 탐탁지 않는 종류의 작품들의 작곡이나 연주 활동을 시켰습니다. 누군가가 모차르트에게 연봉이 얼마냐고 질문하자, 모차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 많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하면 너무 적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글루크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라고 하면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심지어 독살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 근거가 희박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에 관한 어느 소설에서는, 모차르트의 연주를 처음 들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연주에 너무도 매료되어 이렇게 말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저 꼬마가 오래 살면 우리의 수명은 짧아질 거야.”
  빈 궁정에서 일하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성가 합창곡을 작곡하던 중이었습니다. ‘구세주의 말’ 부분을 테너 가수에게 부르게 해야 할지 아니면 베이스 가수에게 부르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살리에리는 선배인 크리스토프 글루크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미 칠순이 넘은 글루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살리에리에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게, 우리의 구세주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내 곧 알게 될 테니, 그때 소식을 전해주겠네!”

 

 •모차르트가 세운 최초 기록과 여행 기록
  모차르트는 음악가였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적인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모차르트는 3세 때 누나 난네를이 치는 하프시코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누나가 레슨 받는 것을 듣고 하프시코드로 직접 3도 화음을 쳤다고 합니다. 4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음악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6세 때 첫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최초의 교향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내림 나장조(K.8)는 8세 때, 네 손을 위한 소나타와 최초의 성악곡은 9세 때, 11세 때는 최초의 극음악을, 그리고 12세는 때 최초의 미사곡과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EuFqwqVwZI -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k521 1악장 듣기 Click
  모차르트는 자주 장기간 동안 여행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총 3천 7백여 일, 약 10년 정도를 여행한 셈이니까, 35년 남짓 살았던 그의 생애 가운데 1/3 정도를 길 위에서 혹은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 연주여행을 시작한 것은 1762년 6세 때인데, 첫 목적지인 뮌헨을 거쳐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에서 피아노 건반을 천으로 덮은 채 연주하여 신동의 솜씨를 과시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도 연주했습니다.
모차르트는 몇 차례 유럽 순회여행을 통해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도시 대부분을 방문했습니다. 물론 연주만 한 것은 아니고, 음악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는 여러 계기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세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품은 물론이고 기악 작품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1777년 가을, 모차르트는 어머니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는데, 파리에서 어머니를 잃는 슬픔까지 겪습니다. 요컨대 모차르트는 인생의 1/3을 여행으로 보내면서 성장, 성숙, 실연, 충격, 고통, 육친의 사망 등 한 명의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잦은 여행과 무리한 일정으로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발병과 회복을 반복했습니다. 빈에서는 천연두에 걸려 쓰러지는 일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난네를이 회복되자마자 다시 연주여행을 강행했습니다. 모차르트가 짧은 생을 살게 된 이유가 어린 시절부터 힘든 여행으로 건강을 해쳤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사용한 언어와 편지
  오늘날 전해지는 모차르트의 편지는 400여 통에 이르는데, 그 편지는 음악가이자 또한 18세기를 살았던 인간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여행 중 모차르트는 부친에게는 독일어로, 누나 난네를에게는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로, 사촌누이인 베즐레와 아내 콘스탄체에게는 프랑스어로 편지를 썼습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한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에 단어와 구절을 예술적으로 배합하여 시를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화가도 아니므로 명암의 효과도 낼 줄 모릅니다. 또 손짓과 몸짓으로 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줄도 모르구요. 무용가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음을 통해서는 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요. 저는 작곡가이거든요.”
모차르트 일가는 서로 매우 가까웠습니다. 가족 간에 주고받은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에는 사랑의 흔적만이 가득합니다. 레오폴트의 단 하나의 걱정거리는 볼프강의 건강과 성공이었고, 그는 자기 아들의 특별한 재능이 허비되지 않도록 잘 이끌어준 역사상 위대한 아버지들 중 하나였습니다.

 

• 모차르트의 부친에 대한 진실과 오해
  자기 자신도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는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아들을 어려서부터 유럽의 궁정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면서 힘들고 긴 여행의 노예로 삼았을 뿐 아니라 돈만 받을 수 있다면 어느 고관 앞에라도 데리고 가 건반을 위한 기교를 선보이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지배적 아버지라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모차르트가 좀더 자라고 나서도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의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 빈의 흥분된 열기 속으로 떠나려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으름장을 놓는 등 모차르트의 사생활을 심하게 간섭했다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는 모차르트 삶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모차르트에 대한 부친의 행동은 아들에 대한 사랑과 염려 때문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Constanze Weber, 1762~1842)는 가계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에 모차르트의 생활을 망쳤다는 비난도 받지만, 이는 근거 없는 설일 뿐입니다. 두 아들을 둔 (다른 네 자녀는 영아기에 사망) 그들의 결혼 생활은 아주 행복했습니다. 모차르트의 결혼 이후 부자 간의 관계는 다소 소원해졌지만, 1785년 부친 레오폴트가 마침내 아들 집을 방문했을 때 근사한 아파트와 높은 생활 수준에 상당히 놀랐다고 합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를 저버린 첫사랑 알로이지아의 동생으로 역시 아마추어 성악가였는데, 모차르트는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콘스탄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콘스탄체는 심성이 착합니다. 그리고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모차르트가 내 대본을 망치지 않았더라면”
  배우이자 가수이며 연극사업가인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1751~1812)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요술피리」의 대본을 썼습니다. 그리고 초연 때는 파파게노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요술피리」가 크게 성공을 거두고,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허풍이 심한 쉬카네더는 분수를 모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이 「요술피리」는 훌륭한 작품이야. 모차르트가 그렇게 형편없는 작곡만 하지 않았더라면 내 대본은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뒀을 텐데!”
▶ https://www.youtube.com/watch?v=s7vJcUogrEI - 오페라 마술피리-‘밤의 여왕’ 아리아 듣기 Click

 

• 말년에 더 크게 타오른 모차르트의 예술혼
  30세를 넘어서면서부터 모차르트에게 서서히 비극의 그림자가 다가오게 됩니다. 작곡가로서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쓰기 시작한 시절이었지만, 이때 청중은 모차르트의 작품에 더 이상 크게 열광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제23, 24번을 비롯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바로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청중이 모차르트의 작품에 시들해진 것은 아마도 모차르트가 의뢰인의 요구나 취미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작곡가로서의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더 치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787년 5월, 모차르트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청중의 외면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아버지를 잃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돈 조반니」 같은 걸작들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돈 조반니」는 프라하에선 성공을 거둔 반면 빈에서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부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그 빛을 더해갔습니다. 그는 마지막 예술혼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_KulQD0IsH0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듣기 Click
  1788년 32세의 모차르트는 교향곡 제39번·40번·41번을 연이어 작곡했고, 이듬해엔 클라리넷 오중주와,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작곡했습니다.
  모차르트는 1790년에 창작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가 겨우 회복한 뒤, 생의 마지막 해에 불멸의 걸작들을 작곡하고는 1791년 12월 5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클라리넷 협주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요술피리」,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겨진 「레퀴엠」이 바로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작곡된 작품들입니다. 

 

• 모차르트에 대한 찬미
  모차르트처럼 음악적 영감에 가득 찼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19세 때인 1816년, 모차르트의 플루트 사중주곡 라장조(K.285)를 듣고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vLxwOh1Tmjw -플루트 사중주곡 라장조(K.285) 듣기 Click

“오늘은 밝고 빛나는 아름다운 날로서, 내 일생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의 매혹적인 음향이 지금도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내 영혼에 새겨진 아름다운 영상은 언제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며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나날에 쾌적한 자극을 줄 것이다. 아, 불멸의 모차르트여.”

  슈만의 부인이면서 당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클라라 슈만은 어느 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다장조(K.457)를 연주하고 나서 브람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다지오는 너무 훌륭해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다장조의 아다지오는 마음을 밑바닥으로부터 뒤흔드는 것 같아, 이걸 치고 있으면 천국의 기쁨이 온몸에 흘러내립니다. 이런 사람이 이전에 살아 있었다니요. 저는 지금 온 세상을 꼭 안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마도 클라라 슈만 외에도 수많은 연주자들과 음악애호가들이 모차르트의 협주곡의 느린 악장에서 이런 느낌과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 엠폴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고향으로 유명하지만, 그곳에서 태어난 또 다른 유명 인사가 바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페루치오 부조니(Ferruccio Busoni, 1866~1924)입니다. 부조니는 모차르트를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지금까지 나타난 음악의 천재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 그는 빛과 그림자를 조정한다. 그는 정열적이고 우주적이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만 결코 지나치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소년처럼 젊고 노인처럼 현명하다. 그토록 인상적인 그의 미소는 지금도 우리들을 조명하고 정화한다.”
이외에도 모차르트에 대한 찬미의 말은 칼 바르트의 고백을 비롯하여 매우 많습니다. 몇 개만 예로 들겠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자기들끼리 즐길 때는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할 것이다.” 칼 바르트
“나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불치병을 앓고 있던 어느 음악애호가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뒤집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생명이 더 허락된다는 것은 모차르트를 더 들을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을 했던 분이 좀더 오래 살았으면 합니다.
“나는 죽는 날까지 모차르트의 숭배자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베토벤
“저 녀석의 수명이 길면 길수록 우리들의 수명은 짧아질 게야.” 살리에리(어린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모차르트가 죽은 뒤 7년 후에) “모차르트의 맛을 알게 되면 다른 음악가에 만족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진다.” 프란츠 니메체크(Franz Niemetschek,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프라하 대학의 교수였다)

 

[2월] 음악탐구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과 그 형제들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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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Joseph Haydn, 1732~1809

하이든의 음악은 진실을 노래하는 이상적인 언어다.

- 괴테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최고 작곡가
 “저녁 시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작곡가는 누구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아마도 하이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를린 필의 본거지 베를린은 유럽 교향악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의 청중은 지극히 높은 감식안으로 콘서트에 올 때는 연주곡에 대해 미리 파악해오고, 혹시 연주자가 실수라도 하면 근엄한 표정으로 잘못을 집어낼 것 같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이먼 래틀은 2007년 2월 하이든의 교향곡 제90번을 연주하면서 ‘유쾌한 교향악 실험’을 벌였습니다. 래틀은 매우 빠르게(allegro assai)라는 지시가 붙어 있는 마지막 제4악장 마지막 부분 가까이에서 연주를 멈췄습니다. 관객들은 잠시 뒤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래틀과 베를린 필은 박수를 무시하고 다시 연주를 이어갔습니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알아차렸습니다. 연주가 이어진 후 5분이 더 흐르고 모든 연주가 멈추자 관객들은 더 큰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연주가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베를린 필의 관객들은 두 번이나 실수를 한 것입니다. 정말이지 베를린의 관객들이 두 번이나 속아 넘어간 것은 작곡가 하이든 자신이 만든 트릭이었습니다. 하이든은 교향곡 제90번에서 말미에 끝날 듯 말 듯한 반복을 통해 종지부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재미를 선사한 것입니다. 근엄함만이 아니라 유머 감각 역시 클래식 음악의 필수 요소입니다.
 ***사이먼 래틀 지휘 - 하이든 교향곡 제 90번 듣기 click
  베를린 필은 두 번의 실수와 멋쩍은 미소를 담은 실황음반을 최근 CD로 발매했습니다. 여기에 래틀이 직접 해설을 썼습니다.
  “청중이 반복 때문에 두 번씩이나 속는 것 또한 엄연히 작품의 일부이며, 만약 하이든이 지금 교향곡을 작곡했다면 실수로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까지 악기로 썼을지 모른다.”

 

•놀람 교향곡과 이별 교향곡
  하이든의 익살과 해학, 즉 유머 감각은 남달랐습니다. 하이든의 교향곡 제94번은 ‘놀람 Surprise’, 또는 ‘큰북울림 Paukeschlag’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제2악장 안단테는 꾸밈없이 조용한 약주로 시작되고, 다시 최고로 약하게 반복되는데, 그때 갑자기 팀파니와 큰북 등을 한꺼번에 연타하면서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후 연주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시 부드럽고 약하게 계속되며 ‘놀람’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하이든은 이 부분을 단순히 기발한 음악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작곡했다고도 하며, 졸면서 듣는 귀족 청중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장난기로 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 *** 하이든 놀람교향곡 제2악장 듣기 click
  교향곡으로는 드물게 5개 악장으로 구성된 하이든의 교향곡 제45번은 일명 ‘고별 Farewell’ 교향곡이라고도 합니다. 제5악장이 시작되면 연주자들은 처음에는 콘트라베이스, 그 다음엔 오보에, 호른 순으로 차례로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결국 맨 마지막에는 바이올린 두 대만 남아 연주를 마치고 보면대 옆에 켜뒀던 촛불을 끕니다. 작곡가의 의도를 알아 챈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그 다음날 전체 단원에게 휴가를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하이든은 두 동생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에게는 큰동생 미하엘 하이든(Johann Michael Haydn, 1737~1806)과 작은동생 요한 하이든(Johann Evangelist Haydn, 1743~1805)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이든은 두 동생보다도 더 오래 살았습니다. 3형제는 서열이 낮은 순서로 먼저 세상을 떴습니다.
  하이든의 작은동생 요한은 형과 같이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후작가에서 테너 가수로 활동하다가 1805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당시 73세였던 요제프 하이든이 죽었다는 소문이 전 유럽에 퍼졌습니다. 파리에서는 이 위대한 음악가를 기리기 위하여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1760~1842)의 「애도의 칸타타」가 연주되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하이든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내가 직접 파리에 가서 지휘를 하는 건데!”
  인쇄기가 드물고 또 복사기가 전혀 없던 시절, 나이 많은 한 악보필사가 하이든의 작품을 정서하면서 70세의 하이든 앞에서 나이 타령을 했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남의 악보만 베껴주고 살아야 한다니, 참.”
 하이든이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오래 사는 비결이 뭔 줄 아는가? 늙는 것이 오래 사는 유일한 길이란 걸 알아두게나.”
  정말이지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젊어서 죽어야 한다는 의미 아닌가? 오래 살려면 늙어서 죽어야 합니다. 모차르트가 단명한 이유는 젊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미하엘 하이든의 「레퀴엠」을 닮은 모차르트의 「레퀴엠」
  미하엘 하이든은 오늘날에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형 요제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인정받는 작곡가였습니다. 모차르트가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난 1762년 잘츠부르크에 정착한 미하엘 하이든은 그 후 43년간 잘츠부르크에 거주하며 많은 종교음악을 묵묵히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종교음악 「독일 미사 Deutsche Messe」입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라단조 K.626」은 미하엘 하이든의 「레퀴엠 다단조 Requiem for The Death of Archbishop Siegmund in c minor)」와 매우 닮았습니다. 그런데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은 1771년에 작곡되었고, 모차르트의 작품은 1791년에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 20년 더 먼저 탄생한 것이지요. 모차르트의 「레퀴엠 라단조」 외에도 「주피터 교향곡」의 최종 악장 역시 미하엘 하이든의 곡과 매우 비슷합니다.
  혹시 모차르트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을 훔쳤거나 베꼈거나 참고했던 것일까요?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는 잘츠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작품을 본보기로 모차르트에게 연습을 시켰다고 합니다. 따라서 미하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모차르트는 음악을 기억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의 뛰어난 모방력이 바로 창의력의 밑바탕이 돼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차르트에게 그가 하이든의 멜로디를 하나 표절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모차르트가 웃으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이든의 이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걸 더 좋게 변형할 수가 없겠더라구요.”
여기에서의 하이든이 요제프 하이든인지 미하엘 하이든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스승, 하이든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스승이었습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처음 만난 것은 1781년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 1733~1803) 남작의 주선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듣기 위한 자리에서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처음부터 하이든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하이든 역시 일찍이 성공한 젊은 작곡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충고와 비판을 언제나 겸허하게 받아들였으며, 하이든의 의견을 그 누구의 말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차르트는 1781년부터 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개의 현악 사중주곡을 하이든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으로 「하이든 사중주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1791년 하이든이 모차르트에게 런던에 함께 가기를 권했지만 모차르트는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파파, 나는 두려워요.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이별이 될 것 같아요.”
모차르트의 타계 소식을 들은 하이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들은 종종 내가 뛰어나다고 말하지. 하지만 모차르트는 내 위에 서 있네.”

 

•파파 하이든
  바흐와 헨델을 통해 최고의 절정기로 치닫던 바로크 음악의 불꽃이 꺼져갈 무렵, 빈 음악계에 등장한 하이든은 고전주의(classicism)의 토대를 쌓으면서 서양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만약 고전주의 음악가의 표상이자 전형으로서의 하이든이 없었다면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나 음악의 성인 베토벤은 고전음악의 기초공사를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제프 하이든은 고전주의 음악가의 표상이자 전형으로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스승이었고 그들의 앞길을 열어준,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또한 아랫사람의 고충을 알아주고 그들 편에 설 줄 알았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어서 ‘파파 하이든 Papa Haydn’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 말 속에는 주변 인물들이 그에게 보낸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음악의 개혁가 하이든
  고전음악의 형식을 완성시키고, 108개의 교향곡을 작곡한 공로로 ‘교향곡의 아버지 Father of The Symphony’라는 별칭을 듣는 하이든은 현악 사중주를 74곡이나 작곡한 덕분에 ‘현악 사중주의 아버지 Father of The String Quartet’라 불리기도 합니다.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에스테르하지 가(House of Esterhazy)에 종속되어 전근대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음악가로서만큼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개혁가였습니다. 음악 역사에 있어 고전주의라는 사조의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당시의 음악이 이전의 바로크나 이후의 낭만음악에 비해 보다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스타일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 현악4중주 Op.64-5 '종달새' 1악장 듣기 click 
  고전주의가 생겨난 때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기이자 계몽주의 시대였는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성을 추구한 계몽사상의 정신이 잘 반영된 것이 바로 하이든의 음악입니다. 괴테가 “하이든의 음악은 진실을 노래하는 이상적인 언어다”라고 한 말 역시 그의 계몽주의적 음악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바로크 음악과는 달리 하이든은 명확한 주제를 제시했으며, 이를 논리적으로 전개시켜나감으로써 연주자나 청중에게 음악 양식의 변화에 주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계몽주의 시대로 나아가는 시기에 하이든이 보여준 시대정신의 반영이었습니다.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F장조 hob. XVI:23 듣기 click 

 

[1월] 음악탐구

 

현대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그 아들들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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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Sebastian Bach, 1685~ 1750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 막스 레거

 

•‘바흐’가 아니라 ‘바다’라야 마땅하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성 ‘바흐(Bach)’는 독일말로 ‘시내’ 혹은 ‘실개천’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대선배 바흐의 곡을 이리저리 검토하다가 너무나 훌륭하여 이렇게 감탄하며 외쳤습니다.
“Not Bach, but Meer* should be his name!”
* 독일어로 Meer는 바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베토벤의 말을 우리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의 성이 ‘실개천’이라니 당치도 않아, 그의 성은 ‘바흐’가 아니라 ‘바다’가 되어야 마땅해!”

 

•바흐는 눈을 감는 날에도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1749년 봄, 64세의 바흐는 뇌졸중 발작과 함께 시력이 눈에 띠게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흐는 당시 유명한 안과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오랜 회복기를 거친 후 눈에서 붕대를 풀었습니다. 침대에 둘러서 있던 자녀들이 바흐에게 물었습니다.
 “아버님, 뭔가 보이세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바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었단다.”
가족들이 수술이 잘 된 것으로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 곧이어 바흐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바흐가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족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때 바흐는 오히려 자녀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 145장 3절을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보잘것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1750년 7월 28일 밤 8시 45분경, 바흐는 65세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곁에서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와 그의 아들들이 임종을 지켜봤습니다.
 바흐가 죽은 후 그의 가족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수많은 악보도 분실되거나 손상된 채 그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의 귀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을 비롯한 후세 사람들의 끈질긴 노고에 힘입어 바흐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모든 곡들이 연주회장의 레퍼토리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바흐의 음악 작품들이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대접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써낸 음악들이 인류의 정신사적 흐름을 가장 농밀하게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고, 항상 종교적 구도의 길을 버리지 않았던 생활관과 음악관이 사람들에게 공감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흐는 인류가 아는 가장 고귀한 음악가였습니다.

 

•바흐의 작품
  음악의 아버지라 일컫는 바흐는 후기 바로크 시대의 헨델과 쌍벽을 이루는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성가대 지휘자로 일생을 보낸 당대뿐만 아니라 인류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모두 18세기 초반과 중반에 만들어졌는데, 풍부한 선율과 절묘한 대위법으로 다성음악(polyphony)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바흐는 평생 1,000곡 이상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300여 곡의 교회 칸타타(지금은 200곡 정도만 남아 있음)와 24곡의 세속 칸타타, 7곡의 모테트와 12곡의 미사곡, 마니피카트, 4곡의 수난곡 및 오라토리오, 81개의 오르간곡, 116개의 클라비어, 39개의 실내악곡, 29개의 협주곡과 관현악곡 등을 작곡했습니다.

 

•바흐의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바흐는 작품도 많이 생산했지만,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 자녀들도 무려 20명을 생산했습니다. 바흐는 처음에 육촌 누이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습니다. 이 행복한 결혼 생활은 1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힘을 합해 재능이 풍부한 두 아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edeman, 1710~1784)과 차남 칼 필리프 에마누엘(Carl Phillip Emanuel Bach, C.P.E. 바흐, 1714~1788)을 낳았습니다.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는 창조력이나 표현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자주 집중력과 침착성을 잃어, 세상과 인연을 끊은 우울한 몽상가가 되었습니다. 프리데만 바흐가 할레에서 주일예배에 얼굴을 내민 적이 있었는데, 눈을 내리뜨고 생각에 잠긴 채, 마리아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예배당 한가운데를 지나, 그대로 반대쪽 문을 통해 나가버렸습니다. 

 

•C.P.E. 바흐와 ‘영국의 바흐’로 불린 J.C. 바흐
  차남 칼 필리프 에마누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 J.C. 바흐)도 뛰어난 음악가로서 바흐의 가문을 빛나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칼과 요한은 성격이 매우 달랐습니다. 요한 크리스티안에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형 칼 필리프 에마누엘은 진지한 대작을 쓰려고 노력하고, 언제나 성의 있게 작품을 쓰는데, 당신은 왜 그런 노력도 하지 않고 돈만 낭비합니까?”
그에 대한 요한 크리스티안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일세. 하지만 우리 형은 작곡하기 위해 살지만, 난 살기 위해 작곡하거든.”
  바흐의 두 아들은 바로크와 고전주의 사이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바이마르에서 태어난 C.P.E. 바흐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738년 (왕자 시절) 프러시아의 프레데리크 대제(Frederick The Great, 1712~1768)의 건반악기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그는 텔레만의 후임으로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을 맡게 된 1767년까지 계속 베를린에 살았습니다. C.P.E. 바흐는 200여 개의 건반악기 소나타로 유명한데, 이 곡들은 소나타 형식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신포니아, 협주곡, 그리고 플루트 소나타는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습니다.
바흐의 막내아들 J.C. 바흐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으나 1762년 런던으로 건너가 평생을 살면서 ‘영국의 바흐’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그는 런던 킹스 극장의 작곡가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여왕의 음악감독으로 일했습니다. 그의 오페라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기악곡들, 특히 신포니아와 40여 개의 피아노 협주곡 등은 나중에 런던에서 만난 8세의 모차르트는 물론 하이든과 베토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정신없는 바흐

1720년 7월 7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자신의 육촌 누이이기도 했던 첫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1684~1720)와 사별했습니다. 바흐는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자기 방에 틀어박혀 일에 몰두하는 동안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장의사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장례비를 달라고 했습니다. 집안일이라면 모두 부인이 처리하는 데 익숙했던 바흐가 무심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사람한테 달라고 해요!”

 

•바흐 이전의 작곡가들, 비발디와 텔레만
  바흐 이전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사계(四季)」로 유명한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큰 지진에 놀란 바람에 칠삭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여러 병을 앓으면서 간신히 성장했다고 합니다. 15세 때 하급 성직자가 된 비발디는 25세 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고, 그해 9월 베네치아의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습니다. 비발디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듣는 이유가 이 당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비발디가 워낙 작품을 많이 썼기 때문에 사실 비슷비슷하게 들리는 곡들이 여러 곡 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에 대해 “똑같은 음악을 100곡이나 쓴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7세 연상인 비발디의 현악 합주곡 몇 곡을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했습니다.
 비발디는 나중에 오페라 흥행 사업에 손을 댔으며, 여가수와 염문을 뿌렸고, 또 낭비벽이 심해서 갖가지 일화를 남겼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빈축을 사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비발디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객사해 그곳의 빈민 묘지에 묻혔습니다. 비발디 생전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이다.”
  비발디보다 3년 후에 태어난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은 프로테스탄트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2주 동안 받은 클라비어 레슨 외에는 따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1701년 텔레만은 모친이 바라는 대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던 중 성 토마스 교회에서 연주된 그의 곡이 라이프치히 시장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격주로 주일예배용 곡을 작곡하는 등 학생이면서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733년 출판된 기악곡집 「타펠 무지크(식탁 음악)」는 독일뿐만 아니라 북유럽, 러시아, 영국, 프랑스로부터 연주 요청이 쇄도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텔레만의 음악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동시대의 작곡가인 바흐와 헨델에 비해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최근 들어 다채로운 악기 편성의 합주곡, 관현악 모음곡, 실내악곡을 중심으로 부흥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흐에 대한 찬사
“바흐는 하늘에서 부르는 대로 악보를 받아 적었다.” 바흐의 두 번째 부인 막달레나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막스 레거
“바흐를 집중해서 계속 들은 뒤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마치 일종의 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것이다.” 아도르노(철학자)
“바흐는 사랑스러운 음악의 신이다.” 드뷔시
“바흐는 음악의 예수이다.” 예후디 메뉴인(바이올리니스트)
“샤콘(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2번 중 제5곡)은 가장 경이적이며 무한한 신비를 지닌 음악 작품입니다.” 브람스(1877년 6월 클라라 슈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 ▶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관련 동영상 보러가기 Click
*** ▶ Bach-Busoni - Chaconne BWV 1004 동영상 동영상 보러가기 Click
“바흐는 화성(和聲)의 아버지이다.” 베토벤
“바흐의 평균율은 구약성서, 그리고 베토벤의 소나타는 신약성서이다.” 한스 폰 뷜로
*** ▶ 바흐 평균율 관련 동영상 보러가기 Click

  멘델스존은 1829년 3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거의 백년 만에 지휘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흐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 ▶ 마태수난곡 관련 동영상 보러가기 Click
 
  바그너는 가장 비(非) 바흐적으로 보이는 작곡가임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바흐는 모든 시대의 가장 놀랄 만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바흐의 음악은 가장 놀랄 만한 기적이다.” 
“바흐로 돌아가자!” 스트라빈스키
“바흐는 12음렬 음악의 선구자이며, 바흐의 음악은 그 최대한의 완전함을 획득하였는데, 베토벤도 하이든도 그리고 가장 완전함에 접근한 모차르트조차도 끝내 바흐와 같은 완전함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쇤베르크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모든 사라방드(Sarabande)는 포르노다.” 앙드레 나바라
“만일 베토벤이 인간 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신의 기적이다.” 로시니
“노년의 바흐 속에서 청춘의 샘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음악학자, 1880~1952,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친척)

 

[12월] 음악탐구

Beethoven Violin Sonata No.9, Op.47, in A Major ‘Kreutzer’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체르

-깊이 있게 듣는 클래식 -

 

“역사적으로 보면 베토벤의 작품은 그전 시대의 성취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외부적인 조건과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으로서 그는 유산을 변모시켰으며 낭만주의 시대의 여러 특징을 이루는 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전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는 베토벤이며 그의 모습은 두 세기에 발을 디디고 있는 거인상처럼 우뚝 솟아 있다.”

D.J. 그라우트

 

서양음악사에서 베토벤처럼 자기 개성이 뚜렷한 음악가도 아마 드물 것이다. 베토벤은 고전주의 시대 말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음악가이며, 동시에 낭만주의 시대의 문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기적인 음악의 천재이며 서양음악사의 한 장을 기록한 위대한 작곡가로서 베토벤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이룩해 놓았다. 그라우트의 말처럼 베토벤은 어느 한 시대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만으로서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의해 완성된 고전주의 시대의 자산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자산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더욱 풍요롭게 발전시켜 결국에는 낭만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을 열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괴테나 실러에 의해 표현된 인간주의 정신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며, 프랑스 혁명을 통해 구체화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베토벤의 음악 속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철학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것을 토로하는 방식은 그 이전 시대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그는 음악을 통해 언어의 도움 없이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바를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 속에는 자기 자신의 삶이 숨 쉬고 있다.
  베토벤은 고전주의 시대를 마무리 지은 사람이고, 스스로가 낭만주의자임을 표방한 적은 없었으나 개인적인 기질로 인해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음악을 자기표현의 방법으로 삼았는데, 자신의 삶과 철학을 토로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적인 특징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주관적 성격이 강한 작품에 있어서도 그 곡을 뒷받침하는 기둥은 ‘고전적 요소’였다.
  베토벤의 음악은 형식미가 뛰어나고 각 부분과 부분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감이 어우러져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 안에서 여러 가지 혁명적인 요소들은 고전적인 구성미를 바탕으로 베토벤 특유의 음악적 언어를 구사한다. 그의 음악은 자유롭고 충동적이고 신비스런 악마적 정신에 휘말려들면서도 그 외형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는다. 베토벤은 음악적 구조와 절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그 양식과 연대기를 기초로 하여 흔히 세 개의 시기로 나뉘는데 그의 낭만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중기의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을 들어보면 어떤 악마적인 힘이 느껴지면서 두려움, 외경, 공포, 고뇌 따위의 감정들이 움직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낭만주의의 본질인 무한한 동경을 일깨우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낭만주의의 선구자로서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베토벤 음악의 낭만성은 고난에 찬 삶의 역정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삶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생활은 그에게 너무나 힘든 짐이었고, 사랑은 실패를 거듭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질적인 귓병이 언제나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음악가로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로 작용했다. 1814년(44세)이래로 그는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투지로써 이러한 난관들을 극복하는 영웅적 기백을 보여 준다. 베토벤의 음악에는 고난과 극복의 역사가 숨쉬고 있고, 그는 결국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개선한다. 위대한 예술성이 고통을 디디고 일어나 비할 바 없는 아름다운 악곡들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크로이체르’는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1803년 5월에 완성되어 베르사유 태생인 명바이올리니스트 크로이체르에게 바쳐진 것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규모가 장대하고 악상이 웅대해서 베토벤 특유의 영웅적 기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보통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보면 바이올린이 주요한 역할을 맡고 피아노는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은데, 베토벤의 이 소나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 동등한 위치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작품에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역할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어서 양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긴밀한 협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작곡가로서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먼저 활약했기 때문에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성질을 잘 이해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은 바이올린에 대해서도 충분히 익숙해질 계기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바이올린의 기초 교육을 시킨 바 있었고, 그 뒤에도 프란츠 리스와 살리에리에게 계속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친구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는 베토벤에게 바이올린이란 악기에 대해 여러 가지 유용한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베토벤은 바이올린 작곡에 슈판치히의 충고를 곧잘 받아들였고, 이 같은 친분이 베토벤에게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작품들은 파가니니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에 의해 만들어진 악곡들처럼 기교 면에서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그 예술성이 뛰어나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모두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만들어냈는데, ‘크로이체르’와 함께 제5번 ‘봄’ 등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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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소스테누토-프레스토로 A장조에 3/4박자. 서주부를 붙인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주부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로 다음과 같은 무반주의 바이올린으로 시작된다( 마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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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율은 아름답고 서정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떻게 보면 비애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베토벤 음악 특유의 서정성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위의 선율은 곧이어 나오는 피아노에 의해 그대로 되받아진다(마디 5~8). 이어 두 악기는 마치 대화하듯이 서로 경쟁적으로 연주를 계속해 나간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파트가 잠시 무엇을 찾는 듯이 협주적인 노래를 계속하는 사이에 어느덧 분위기가 바뀌어 첫 번째 주제가 등장하게 된다(마디 18).
다음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제1주제부를 이루는 데 쓰인 선율이다(마디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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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기는 프레스토로 정열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선율을 잘 뜯어보면 첫 부분의 하향하는 음형을 스타카토의 바이올린이 채워 올라가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선율은 서주부 때와 마찬가지로 곧이어 피아노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마디 27~36). 이처럼 주제를 반복하는 것은 주제의 인상을 더 강하게 특징지어 주는 역할을 한다.
첫 번째 주제가 제시된 뒤 피아노는 화려한 음형으로 피아노의 넓은 영역을 넘나들고, 굴곡이 심한 선율로 주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 뒤를 따르는 선율은 뒤에 나올 제3주제를 예감하게 해 준다. 다음에 예로 든 선율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제3주제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마디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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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새로운 악상이 전개되어 나가는 듯하다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서로 경쟁하듯이 빠르고 힘찬 음형들로 제1주제부를 수놓아 나간다.
제2주제는 제1주제와는 달리 침착하여 편하게 쉬면서 안식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다음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두 번째 주제를 이루는 부분이다( 마디 8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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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제는 온음표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첫 번째 주제와는 달리 느릿한 것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2주제는 짧은 아다지오 악구로 일단락을 짓고 있다.
두 번째 주제의 제시가 끝나면 분위기가 바뀌어 앞서 나왔던 것처럼 빠른 프레스토로 다그치듯 악곡이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는 제2주제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제1주제부의 음형들이 악곡을 지배하고 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폭풍 치듯 전개를 계속해 나가는 중에 세 번째 주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은 세 번째 주제를 이루는 선율이다(마디 14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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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선율은 피아노로 연주되는데, 곧이어 바이올린에 의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제1주제의 음형을 연상시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새로운 주제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제3주제부에서도 예의 그 다그치는 듯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주제의 제시가 끝나면(마디 193) 서주부를 제외한 제시부 전체가 다시 한 번 반복된다(마디 18~193). 제시부의 반복이 끝나면 곧이어 제3주제를 중심으로 발전부의 전개가 시작된다(마디 194). 이 부분에서는 바이올린이 매우 정열적으로 주제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감정적 노출이라 생각될 만한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모든 움직임은 균형이 잡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절제감이 악곡의 평형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발전부의 전개는 주로 제3주제를 가지고 이루어져 있지만 전개되는 과정에서 제1주제부의 특징적인 리듬이 악곡 전체를 지배한다. 이처럼 제1주제부의 음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악곡에 통일감을 주고 또 각 부분간의 연결감을 느끼게 한다.
재현부(마디 323~599)는 첫 번째 주제가 피아노로 다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베토벤은 재현부를 구성하는 데 있어 제시부를 그대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대신 자유롭게 변화를 가해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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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기는 안단테 콘 바리아치오니로 주제와 4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2/4박자에 F장조.
주제는 가곡풍의 아름다운 노래로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마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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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선율은 피아노로 연주되는데, 곧이어 바이올린에 의해 되받아진다(마디 8~16). 처음 가락이 피아노에 의해 낮은 음부에서 시작되면 바이올린은 그 음정을 높이 하여 같은 가락을 노래하는 것이다.
두 번째 주제는 피아노에 의해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마디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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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새는 첫 번째 주제와 상이하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과 분위기는 매우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주제가 끝나면 두 개의 주제는 다시 한 번 나타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조금 변형되어 있다(마디 27~46). 이 악곡은 마지막에 첫 번째 주제를 짧게 재현시키는 것으로 끝이 난다(마디 47~54).
첫 번째 변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각기 반복된다(마디 1~8, 마디 8~27). 첫 번째 부분은 제1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제는 피아노 부분에 의해 다소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다음은 제1변주의 첫 번째 부분의 일부이다(마디 1~4).

10

제1변주의 주축을 이루는 음형은 피아노 반주와 바이올린 파트에 나타나는 16분음표이다. 이 16분음표는 셋잇단음으로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1변주의 두 번째 부분은 다음과 같이 셋잇단음표를 이용하여 주제가 은밀히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마디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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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변주의 두 번째 부분은 제2주제의 선율을 주축으로 해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다시 제1주제가 등장하여 악곡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마디 20).
  제2변주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각기 반복되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마디 1~8, 마디 8~27). 제2변주는 일괄되게 32분음표의 음형이 나타나는데, 두 번째 변주보다 그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주제의 모습은 피아노 부분에 숨겨져 있으나 그 가락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피아노에 나타나는 첫 번째 주제의 부분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주제 선율의 원래 모습이 어떻게 변형되어 있는지 살펴보자(마디 1~3).

12

제2변주의 두 번째 부분은 제2주제로부터 파생된 선율을 보유하고 있다. 다음은 제2변주에 나타난 두 번째 주제의 모습이다(마디 8~11).

13

그러나 제2변주도 제1주제를 마지막 부분에 다시 끌어들임으로써 마무리를 하고 있다(마디 20).
제3변주는 단조로 애절한 느낌을 준다. 앞서 나왔던 주제와 변주부가 F장조였던 것과 관련하여 제3변주는 F단조로 이루어져 있다.
제3변주도 크게 두 부분으로 각기 반복되고 있다(마디 1~8, 마디 8~27). 그러나 제3변주에서는 두 개의 주제가 희미하게 드러나기는 하면서도 그 모양새가 많이 변하여 주제를 알아듣기가 다소 힘들어진다.
다음은 제3변주의 첫 번째 부분의 일부이다. 원래 주제의 모습이 어떻게 변형되어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보자(마디 1~3).

 

15

제3변주의 두 번째 부분도 제2주제를 끌어들여 시작하고 있다. 다음 악보를 보면 제2주제의 모양새가 많이 변화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마디 8~11).

16

제3변주의 두 번째 부분도 마지막에 제1주제를 끌어들임으로써 악곡을 마무리 짓고 있다(마디 20).
제4변주는 장식음들을 많이 사용하여 마지막 변주를 화려하게 끝맺는다. 그 형식과 구조는 앞서 나왔던 주제와 변주들에 비교해 볼 때 매우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리고 주제의 원래 모습을 찾아내기도 상당히 힘드는데, 그것은 주제 선율들이 분산되어 많은 장식음들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부분에서는 선율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다음은 제4변주의 첫 부분을 이루는 선율이다. 많은 장식음을 동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제 선율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마디 1~3).

17

위의 선율은 먼저 피아노로 연주되는데, 이때 바이올린은 쉬고 있다가 잠시 후에 피치카토로 합류하게 된다. 피치카토로 주선율에 감칠맛을 더해주던 바이올린은 곧이어 주선율을 노래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마디 8).
제4변주는 주제가 자유로운 전개를 해나감으로써 그 규모가 많이 확대되어 있다. 베토벤은 과연 악성다운 면모를 드러내면서 주제들을 재미있게 다루어 악곡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맺는다.

18

 

프레스토로 빠른 소나타 형식이고 A장조에 6/8박자이다.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끝곡은 원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의 마지막 악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베토벤이 매우 조급하여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마무리곡으로 가져다 쓴 것이라 한다. 그러나 곡의 구성이나 분위기가 빌려다 쓴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잘 어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악곡의 첫 시작은 피아노가 A장조의 으뜸화음을 박력 있게 울림으로써 주제의 개시를 알리게 된다. 피아노의 여음이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첫 번째 주제는 다음과 같은 모양새를 갖춘다(마디 1~10).

19

무곡 타란텔라의 리듬적 특징이 살아 있어 뛰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 약동하는 리듬은 악곡 전체를 지배하면서 질주하듯 달려 나간다. 특히 강박에 포르티시모가 주어져 있어 리듬을 훨씬 탄력적으로 만든다.
위에서 보는 것 같은 주제 선율은 뒷부분에서 음정을 달리 하여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마디 28, 마디 62) 이처럼 같은 주제가 음정을 달리하거나 악기를 바꾸어서 재등장하는 것은 서양의 클래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제1주제부는 앞서 나왔던 주제의 선율에서 선보였던 음형들로 구성되고 있다. 여기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경쟁하듯 연주를 해나가는데, 그 열기가 더해져 음악이 한층 더 활기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제1주제부가 끝나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제2주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제3악장을 이루는 데 쓰인 두 번째 주제이다( 마디 127~133).

20

위의 선율은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함께 연주하는데, 제1주제와는 전혀 달리 애상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 여기서는 박자가 2/4박자로 바뀐다.
제2주제가 끝나면 예의 그 뛰는 듯한 리듬의 음형이 계속 나오다가 제시부가 끝이 난다. 제시부는 제1주제를 효시로 다시 한 번 그대로 되풀이된다(마디 1~178).
발전부는 제1악장의 발전부와는 달리 제1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는 앞서 나왔던 첫 번째 주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재현부는 첫 번째 주제가 다시 나타남으로써 이루어진다(마디 290). 첫 번째 주제에 이어 두 번째 주제까지 그 모습을 다시 보여 주면서 코다를 마지막으로 모든 악곡은 마무리된다.

 

[11월] 음악탐구

S. Bach Orchestral Suite No.1~4, BWV 1066~1069

바흐 관현악 모음곡

-깊이 있게 듣는 클래식 -

 

 바흐의 위대함은 기존의 음악적 전통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루어냈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바흐는 바이마르 공의 예배당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하던 시절,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음악에 흥미를 가지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른 작곡가들을 공부하는 방식은 그들의 음악을 그대로 베끼거나 편곡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자신의 양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바흐의 연구 대상이 되었던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그에게 간결한 주제를 쓰는 법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화성 구조에 있어 명료성을 기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이후 바흐의 주제는 계속적인 리듬의 흐름을 타고 큼직큼직한 형식의 구조 속에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발전은 이태리적 성격과 독일적인 성격이 융합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질은 바흐 자신이 지니고 있던 풍요로운 상상력과 대위법적인 기교에 힘입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고유한 양식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바흐는 작품을 만들어 낼 때 전통적인 대위법적 작법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여기에 화성적인 수법을 가미시켜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을 창출해냈다.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화성의 아버지’라고 말한 적도 있었는데, 이는 바흐의 화성음악적 수법이 얼마나 뛰어났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바흐의 음악 안에서는 화성과 대위법, 선율과 다성음악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원칙들이 서로 만족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이 같은 기교적인 완숙함 속에서 18세기 초에 통용되던 허다한 양식들이 통합되어 거대한 건축물을 형성한다. 서양음악사의 큰 줄기 안에서 바흐가 차지하고 있는 핵심적인 위치는, 그가 바로크 말기의 전성을 이루었다는 역사적 중요성을 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창출해 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바흐의 음악세계는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주제의 개성적인 면모나 무궁무진한 음악적 착상들, 화성적인 작법과 대위법적인 기교의 만족스러운 화해, 형식에 있어 투명성과 명료성을 다양한 용법 속에 융합해 냈던 위대한 음악성 등은 그가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영역이다.
  바흐는 관현악 작품으로 쓰인 모음곡을 4개 남겨 놓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제2번과 제3번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들은 규모가 장대한 프랑스풍의 서곡으로 당시의 고전 모음곡들이 그러하듯이 전주곡 혹은 서곡을 시작으로 몇 개의 춤곡들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다. 그 춤곡의 수나 유형은 모음곡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전형적인 유형은 알라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등 4개의 춤곡이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가보트나 미뉴에트, 부레, 파스피에, 루르 같은 형식도 끼어들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형식들은 반드시 춤곡의 성격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모음곡이 점차로 무용음악적 성격을 벗어나 순수 기악곡 형식으로 정착하게 되는 발전 과정이다.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은 그가 쾨텐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각 작품마다 편성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현악 4중주를 중심으로 몇 개의 관악기를 곁들이고 저음에 쳄발로를 배치하고 있다. 4개의 모음곡 모두가 조촐하고 아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데, 그 표정이 밝고 명랑하여 춤곡이 지니니 즐거운 표현성이 드러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악보에는 ‘서곡’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을 볼 수 있다. 모음곡에 ‘서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서곡’이나 ‘신포니아’라는 용어들이 오늘날과 같이 명확한 개념을 지니지 않은 상태에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음곡 작품에도 ‘서곡’이라는 명칭을 붙여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알아두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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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은 C장조로 되어 있다. 모두 일곱 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작품 사이에 조성 변화가 없는 것이 바로크 시대의 모음곡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이다.
첫 번째 곡은 서곡으로 바흐가 전형적으로 사용했던 프랑스풍의 서곡이다. 서곡의 시작은 다음과 같이 느리고 장중한 그라베로 시작된다(마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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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의 긴 선율이 실을 뽑아내듯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데, 이 같은 선율 작법은 바로크 시대의 고유한 것으로 ‘포르트슈피눙(Fortspinnung)’이라 부른다.
그라베의 제1부는 그대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마디 1~17).
중간부는 경쾌한 비바체이지만, 그라베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절도감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중간부는 푸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뒤에 다시 최초의 그라베가 돌아와서 세도막 형식을 이루고 있다(마디 98). 다시 돌아온 그라베의 선율은 첫 번째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두 번째 곡 쿠랑트는 프랑스어로 ‘달려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질주하는 듯한 빠른 속도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부점을 지닌 음형을 주조로 하여 리듬에 탄력성을 부여하고 있다. 오보에 두 개와 제1바이올린이 계속 유니슨으로 주선율을 노래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구성은 짧지만 짜임새 있는 세도막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다음은 첫 번째 부분을 이루는 선율의 일부이다. 이 춤곡의 리듬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마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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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분은 그대로 다시 반복된다(마디 1~8).
세 번째 곡은 두 개의 가보트로 이루어졌다. 각 가보트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각각 반복되는데, 첫 번째 가보트(마디 1~24)는 전체 관현악이 함께 선율을 노래하는 데 반해 두 번째 가보트(마디 25~48)는 오보에가 중심이 되어 가락을 이끌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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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춤곡은 포를란느(북이탈리아 기원의 춤곡으로 6/4 또는 6/8박자. 즐거운 느낌을 주며
지그와 비슷하다)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뱃사공을 연상시키는 악곡이다. 단순한 두도막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분은 반복된다(마디 1~8, 마디 8~24). 다음은 포를란느를 이루는 두 개의 선율이다. 두 선율의 성격이 서로 닮아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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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곡은 두 개의 미뉴에트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 곡 가보트의 경우에서처럼 두 번째 미뉴에트가 끝나면 제1미뉴에트가 반복된다. 다음은 미뉴에트의 각 부분을 이루는 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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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미뉴에트는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각이 그대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제6곡은 부레로 프랑스에서 기원한 유쾌한 농부의 춤곡이다. 이번 곡도 두 개의 부레로 나뉘는데, 제1부레가 반복되어 제2부레는 중간부의 역할을 하게 된다(마디 24~48). 이번 곡에서도 각 부레는 두 부분으로 나뉘면서 각 부분이 반복되는 양태를 띠고 있다.
일곱 번째 곡은 파스피에로 그 구조적 특징은 앞서 나왔던 악곡들과 대동소이하다. 두 개의 파스피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반복된다. 두 번째 파스피에가 끝나면 제1파스피에가 반복되어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일곱 번째 곡 파스피에를 이루는 데 쓰인 선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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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을 포함하여 모두 일곱 개의 악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은 B단조이다.
첫 번째 곡은 프랑스풍 서곡으로 제1번 때와 마찬가지로 느리고 장중한 그라베로 시작하여 경쾌한 알레그로를 지나, 다시 느리게 하여 끝맺음을 하고 있다. 플루트의 맑고 투명한 음색이 특징적인 악곡으로 그 음색적 효과가 뛰어나다. 다음은 서곡을 시작하는 첫 번째 선율이다(마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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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락은 장식적인 음형이 대단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알레그로의 부분과 매우 상이함을 알 수 있다(마디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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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그로 부분이 끝나고 다시 나타나는 그라베의 선율은 첫 번째 선율과 그 성격은 비슷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
두 번째 악곡은 경쾌한 알레그로의 론도로 가곡풍의 가락을 낀 론도 주제가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다. 다음은 처음으로 나타나는 론도의 주제이다(마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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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곧바로 변화 없이 그대로 반복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된다(마디 44~52).
세 번째 곡은 사라방드이다. 바흐는 춤곡인 사라방드를 일종의 가곡에 가깝게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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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악곡은 두 개의 부레로 이루어져 있다. 제2부레 이후 제1부레가 다시 반복되어 제2부레는 일종의 트리오처럼 취급되고 있다(마디 24~36). 두 개의 부레는 각기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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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곡은 폴로네즈로 클래식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음직한 가락이다. 폴로네즈는 원래 폴란드의 춤곡인데, 차츰 예술적인 악곡 형식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 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주제로 플루트와 제1바이올린이 선율을 노래하고 후반부는 두블(18세기에 행해진 변주의 일종으로 화성의 골격은 그대로 두고 비교적 단순한 선율적 장식을 나타낸 것을 말한다)로서 플루트가 주제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기교를 부리고 있다. 두블이 끝나면(마디 13~24) 다시 폴로네즈로 돌아가 악곡이 마감을 하게 된다. 다음은 제5곡 폴로네즈를 이루는 데 쓰인 선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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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곡은 트리오가 없는 미뉴에트로 되어 있다. 이 곡 역시 크게 두 부분(마디 1~8, 마디 9~24)으로 나뉘고, 각 부분이 그대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다음은 미뉴에트를 이루는 데 쓰여진 선율들이다. 두 부분의 성격이 비슷하여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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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곡은 바디네리(프랑스어로 ‘농담·야유’라는 뜻. 이 명칭은 스케르초와 같으며 2박자의 명랑하고 빠른 악장에 사용된다)로 플루트의 음빛깔이 독특하게 살아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악곡은 모음곡에서 빠져나와 홀로 단독으로 연주되는 경우도 많아서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 경쾌하고 발랄한 플루트의 움직임이 재미나게 가락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제7곡 바디네리 역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음은 바디네리를 이루는 데 사용된 두 개의 주선율이다. 두 개의 가락이 비슷한 분위기와 정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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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섯 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으로 관현악 모음곡 제2번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조성은 D장조로 되어 있다.
제1곡은 장대한 규모의 프랑스풍 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악곡의 내용 역시 웅장감을 주는데, 이 같은 느낌은 특히 그라베의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이 서곡 역시 느리고 장중한 그라베를 시작으로 활기찬 비바체의 부분을 지나 다시 그라베로 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라베와 비바체의 각 부분은 16분음표의 음형을 주조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빠르기가 다른 탓에 서로 상이한 느낌을 주고 있다. 다음은 그라베의 첫 부분을 이루는 선율이다(마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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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락은 매우 웅대한 느낌을 주는데, 서곡의 장대한 규모와 그 성격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 같은 느낌은 16분음표의 음형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4분음표의 길게 끄는 음에 무게가 실려 더욱 강조되어 두드러져 보인다.
다음은 비바체 부분에 나타나는 선율의 일부이다(마디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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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선율은 힘차게 밀고 나가는 듯한 추진력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이 그라베의 부분과 다른 것이다. 비바체의 부분이 끝나고 다시 나오는 그라베의 선율은 앞서 나왔던 그라베의 가락과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 기본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변화가 가해진 것이다(마디 10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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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악곡은 아리아로 매우 우아한 느낌을 준다. 이 곡은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G선상의 아리아’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현악기만이 연주하도록 되어 있는데, 선율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설득력 있는 악기 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아는 크게 두 부분(마디 1-6, 마디 7-18)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은 그대로 다시 한 번씩 반복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음은 아리아의 각 부분을 이루는 데 쓰인 선율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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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곡은 가보트로 앞서 나왔던 아리아와는 대조적으로 힘찬 느낌을 주고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서곡의 비바체 부분이 지니고 있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보트는 크게 전반(마디 1~26)과 후반(마디 26~58)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각 부분별로 되풀이된다. 후반부 마지막 부분의 반복이 끝나면 전반부로 되돌아와 그대로 다시 한 번 전반부를 되풀이하게 된다. 다음은 각 부분을 이루는 주요 선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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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악곡은 부레인데, 트리오가 없이 전반(마디 1~8)과 후반(마디 8~32)의 두 부분으로 나뉘고, 각 부분은 다시 그대로 되풀이되는 양태를 보인다.

다음은 제4곡 부레를 구성하는 선율들의 단편이다. 두 선율이 모두 비슷한 느낌과 분위기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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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곡인 지그 역시 앞서 나왔던 부레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전반(마디 1~24)과 후반(마디 24~72)으로 이루어진 두도막 형식이며, 각 부분이 그대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다음은 지그의 두 부분을 이루는 데 쓰인 두 개의 선율이다. 이 가락들이 주는 느낌은 같은 리듬을 사용해서 비슷한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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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관현악 모음곡 2번과 3번만큼 자주 들을 수 있는 악곡은 아니다. 전 악장이 D장조로 모두 다섯 개의 악곡을 모아 놓은 것이다.
제1곡은 서곡으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의 서곡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라베(마디 1~24)-알레그로(마디 24~166)-그라베(마디 167~187)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두 번째 곡은 부레로 되어 있다. 두 개의 부레가 각각 두 부분(마디 1~14, 마디 14~42)으로 나뉘어 각기 되풀이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부레가 끝나면 다시 첫 번째 부레로 되돌아가 두 번째 부레는 마치 트리오인 것처럼 중간부의 역할을 담당한다.
세 번째 악곡은 트리오가 빠진 가보트로 만들어져 있다. 가보트는 전반(마디 1~10)과 후반(마디 10~30)으로 나뉘어 두도막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각 부분이 반복되도록 기획되어 있다. 그 길이가 짧고 단순하여 간주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제4곡은 트리오가 딸린 미뉴에트로 되어 있다. 단순한 세도막 형식이지만 각 악기 간의 음색의 대조가 재미있게 느껴진다.
다섯 번째 곡은 레쥐상스(‘기쁨’이란 뜻으로 18세기경에 쾌활하고 경쾌한 소곡에 붙여진 명칭. 빠른 3박자로 쓰일 때가 많다)로 춤곡은 아니지만 지그풍의 리듬으로 춤곡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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