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10월 2017

[10월] 석세스 레슨 포인트

14-15 주제와 변주(by Cornelius Gurlitt)

 

1. 준비연습:

a. p. 10의 <3화음과 둘째 자리바꿈>을 연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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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악보와 같이 화음을 펼쳐서 연습한 후 오른손의 음형을 왼손과 대칭(하행으로 펼치기)으로 연습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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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듣기

a. 19세기 독일의 작곡가 Gurlitt의 변주곡입니다. 변주곡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음악을 들어 보세요.(악보의 삽화에서 그 힌트를 얻어 보세요).

b. 주제와 변주에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찾아가며 들어볼까요?

  1.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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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 14 주제에서 자리바꿈화음들을 찾아가며 연주해보세요.

스타카토 부분은 포르타토로, 긴 화음(2, 4, 8마디...)은 푸시 오프로 연주합니다.

* 포르타토: 레가토와 스타카토의 중간 정도로 연주. 끈적끈적한 느낌으로..

푸시오프: 팔의 무게를 건반 밑바닥까지 떨어뜨린 다음 손목부터 이완하여 팔의 무게를 들어 올려 연주

b. 5-8, 13-16마디는 한 프레이즈로 길게 호흡하며 다이내믹을 조절하여 연주합니다.

c. p. 15 변주에서는 4급에서 배웠던 손목과 팔 돌리기 연습을 기억하며 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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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무리 학습

  1. 또 다른 변주곡을 작곡(리듬이나 오른손 음형을 바꾸어)하여 서로 발표해 보세요.

[10월] 음악탐구

 음악극의 창시자 바그너와 코지마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바그너                          코지마

                                      Wilhelm Richard Wagner,                       Cosima,
                                              1813~1883                                  1837~1930

 바그너는 전쟁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단지 예술일 뿐,
그것에 우리가 정치적인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 다니엘 바렌보임

 

  • 바그너와 여인들

「니벨룽의 반지」로 유명한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난봉꾼이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836년 11월 24일 22세의 바그너는 26세의 여배우 미나 플라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첫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리가(지금의 라트비아 수도)로 이사하여 바그너는 그곳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되었습니다. 몇 주 후 미나는 군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은 나중에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났습니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이 일은 20년 후에 비극적으로 끝날, 바그너의 문제 많은 결혼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1852년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만난 후원자 비단 상인 베젠동크(Otto von Wesendonck)의 부인 마틸데(Mathilde)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58년 서로 간에 오가던 연서가, 공식적으로는 바그너의 부인인 미나에게 발각되면서 미나도 마틸데도 바그너를 떠났습니다.

그 직후 바그너는 자신의 제자이자 지지자이기도 한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의 부인 코지마(Cosima, 1837~1930)와 눈이 맞았고, 코지마는 곧 바그너의 사생아를 출산합니다. 그런데 코지마 역시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마리 다구(Marie, Comtesse d’Agoult, 1805~1876)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습니다.

1866년 미나가 사망하고 코지마와 뷜로는 이혼하게 됩니다. 1870년 드디어 모든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바그너와 코지마는 정식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1883년 바그너가 70세로 타계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리하면, 바그너는 57세에 24세나 연하인 33세의 부인과 결혼했는데, 장인이자 친구인 리스트보다는 겨우 두 살 아래였고, 부인의 전 남편 한스 폰 뷜로보다는 열일곱 살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13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장인인 리스트는 바그너보다 3년 더 살았고, 코지마는 무려 47년을 더 살면서 바그너의 유업인 바이로이트 축제를 꾸려나갔습니다.

 

로시니 악보로 베토벤을 지휘한 바그너

1855년 바그너가 런던에서 런던 필과 8회의 연주회를 연속적으로 지휘할 때의 일입니다. 바그너가 제1회 공연 때 베토벤의 교향곡을 암보로 지휘했는데, 이튿날 런던의 신문에 바그너가 암보로 지휘를 하는 등 불손하다고 혹평한 평론이 개제되었습니다.

그 다음 공연에서 바그너는 보면대에 악보를 놓고 그것을 보고 지휘했더니 이제는 런던의 평단도 호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악보는 베토벤의 것이 아니고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로, 사실은 바그너가 거꾸로 놓고 아무렇게나 넘겼던 것입니다.

 

바그너와 비스마르크의 만남

바그너와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 1815~1898)는 인간적으로 서로 존경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1871년 바그너는 작은 마을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을 건립할 곳으로 결정했습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해에 그곳으로 이주했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모금을 위한 콘서트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축제극장의 건설은 1874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Ludwig Ⅱ, 1845~1886)가 거액의 기부금을 제공한 후에 본격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876년 8월 축제극장은 「니벨룽의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개관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매년 여름이면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1870년대 중반 한 모임에서 비스마르크와 바그너가 만났을 때 바그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가장 큰 소원은 각하 곁에서 2, 3년 동안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비스마르크는 즉각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참 애석하군요. 지금 상태로는 내가 바이로이트로 전근할 것 같지 않군요.”

비스마르크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국민들을 설득하는 연설과 민주주의적 다수결이 아니라, 쇠(鐵)와 피(血)로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쇠와 피를 자주 강조했기 때문에 철혈(鐵血) 제상이라 불렸습니다.

독일제국의 통일과 유럽 제패를 꿈꾸었던 비스마르크에게 바그너의 음악은 자신의 목표 달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그너와 볼프의 첫 만남

빈 슈타츠오퍼에서 「탄호이저」가 다시 상연되었을 때, 바그너는 특별손님으로 초대되었습니다. 막이 바뀔 때마다 발을 구르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청중 가운데에는 오스트리아의 남부 도시 그라츠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빈에 온 15세의 음악전공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맨 위층의 가장 싼 표를 사기 위하여 몇 시간이나 줄을 서곤 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듣게 된 그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높여서 “브라보, 바그너, 브라비시모 바그너”하고 외쳤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게 재미있어서 정작 마이스터보다도 그쪽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날 밤부터 바그너는 그 학생의 우상이 되었고, 공연이 끝나자 그는 바그너에게 다가가 당돌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을 뵙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던 젊은이입니다.”

“그래,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그 학생은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작곡한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네의 작품에 대한 비평 같은 건 할 수 없어.”

젊은이는 바그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떨지 정도라도….”

“내가 자네처럼 열다섯 살이었을 때 내가 성공할지 어떨지 아무도 확신을 갖고 나에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네. 자네가 좀 더 큰 뒤에 또 찾아오게.”

“저는 위대하신 선생님을 모범으로 삼겠습니다.”

“자네 이름이 뭐지?”

“후고 볼프입니다.”

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는 천재 작곡가로 분류해도 좋을 듯한데, 그는 미켈란젤로, 괴테, 하이네 등의 시에 곡을 붙여 3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볼프는 동갑내기 구스타프 말러와 친구였습니다. 1875년 바그너를 만나 격려를 받았고, 1879년 브람스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방탕한 생활로 매독에 걸려 트라운 호수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정신병원에서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루트비히 2세가 없었다면 바그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뮌헨이나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기차로 한두 시간 남쪽으로 가면 퓌센이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 산중턱에는 속칭 ‘백조의 성’으로 알려진 노이슈반스타인(Neuschwanstein) 성이 있습니다. 디즈니랜드의 모델이기도 하고 또 대한항공의 광고 포스터에도 나왔던 바로 그 성인데, 먼발치에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이 바로 바그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루트비히 2세입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루트비히 2세는 성안의 거의 모든 벽화를 바그너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으로 장식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바그너는 이 성에는 단 한 차례도 와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1845년 루트비히 2세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독일어를 사용하는 3대 강국인 바이에른 왕국(존속, 1806~1918)의 국왕 막시밀리안 2세와 프로이센 공주 마리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61년 2월 2일, 16세의 감수성이 뛰어난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 곧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나머지 인생과 바그너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864년 국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18세의 나이로 바이에른 왕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무렵 바그너는 우연히도 루트비히 2세가 탄생한 해인 1845년에 작곡한,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대표작 「탄호이저」의 흥행 실패로 많은 부채를 지고 채권자들로부터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864년 그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를 만나게 되면서 바그너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재산으로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주었고 바그너는 음악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루트비히 2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바그너의 후기 명작들, 예컨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그리고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 중 ‘지그프리드’와 ‘신들의 황혼’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1864년 5월 3일 바그너가 루트비히 2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오, 은혜로 충만하신 왕이시여! 천상의 감동에서 솟아난 눈물을 당신께 바침으로써, 그리도 비천하고 애정에 굶주려왔던 제 가련한 인생이 품고 있던 시적 경이감이 드디어 지고한 현실이 되었음을 당신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 인생의 마지막 한 단어까지, 마지막 한 음계까지, 저의 인생은 당신께 속해 있습니다.”

 

 바그너와 숫자 13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13이라는 숫자를 싫어하는데, 바그너는 13과 인연이 많습니다. 바그너는 1813년 태어났으며, 1813을 합하면 13이고, 바그너의 원명 Richard Wagner의 글자 수는 13개이고, 데뷔한 해 1831년의 숫자를 합하면 13이고, 첫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초연한 1840년의 숫자를 합하면 13이고, 파리 공연은 1861년 3월 13일에 했고,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 발표는 1876년 8월 13일이었고, 오페라 작품 수는 모두 13개였으며, 그리고 1883년 2월 13일에 사망했습니다.

 

19세기 최대의 스캔들, 바그너와 한스 폰 뷜로 그리고 코지마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는 피아니스트, 지휘자, 바그너 음악 해석의 권위자, 그리고 음악평론가였습니다. 그는 9세 때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처음 배웠지만,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1850년 바그너에게 지휘를 배웠으며, 이후 베를린의 민주정치 모임에서 활동하면서 독일 민족음악운동에 대한 바그너 이론을 보급했습니다. 1851년 리스트의 제자가 되었으며 1853년부터 순회공연을 시작하여 피아니스트로서 당대의 거의 모든 주요 작품들을 연주했습니다. 1855년에는 베를린 슈테른 음악원의 피아노과 과장이 되었습니다.

마치 슈만이 스승의 딸 클라라와 결혼한 것처럼, 1857년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했습니다. 1864년 뮌헨 궁정 음악감독이 되어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뷜로에게 그것은 비극이었습니다.

19세기 음악계의 최대 스캔들은 뷜로의 영웅이자 스승인 바그너와 뷜로의 아내 코지마의 간통사건입니다. 한스 폰 뵐로는 절망하여 심하게 앓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가장 난처해진 사람은 물론 리스트였습니다. 리스트는 관련 당사자 3인을 모두 잘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리스트는 파멸 직전의 뷜로를 위해 두 사람의 결혼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끝내 바그너에게로 간 딸을 진정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뷜로는, 코지마는 바그너 같은 거인적 천재를 요구했고 바그너 또한 코지마 같은 지적이고 예술적인 여성의 공감을 필요로 했으므로 둘이 결합되는 건 필연적인 결과라는 코지마의 말에 동의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만사를 잊고 휴양지 바덴으로 가서 사람들을 피하고자 현관 입구에 자필로 이렇게 써 붙였다고 합니다.

“오전은 일체의 면회사절. 오후는 외출 중이므로 면회불가.”

이혼 후 뷜로는 바그너 진영을 떠나 브람스를 필두로 한 바그너의 적대 진영에 합류해 브람스 음악의 열렬한 전위병이 되었습니다. 바그너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빠짐없이 거론되는 비난의 말들, 즉 시기, 질투, 과대망상, 자만, 도덕불감증, 르네상스적 무자비성, 기만과 허위의식 등을 쏟아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뷜로는 자신의 지휘 레퍼토리에 바그너의 작품을 제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좋게 말해 뷜로는 음악가 바그너와 인간 바그너를 구분하여 대했습니다.

 

바이로이트를 완성한 코지마와 그 후예들

바그너는 사후에도 독일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식당 웨이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오늘은 어떤 오페라가 상연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공연되는 날에는 고기와 술이 많이 팔립니다. 그러나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파르지팔」이 공연되는 날에는 모두 우울해서 생선이나 채소, 그리고 물밖에 주문하지 않아서 망합니다.”

1883년 바그너와 코지마 부부는 베니스에서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팔라초 벤드라민(Palazzo Vendramin)을 구경하고 있던 중 바그너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70세 생일을 두어 달 앞두고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곧 바이로이트로 옮겨졌고 반프리트 저택(Villa Wahnfried)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코지마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는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코지마는 바그너가 남기고 간 예술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완성시키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떠올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후 바그너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코지마가 착수한 첫 작업은 남편과 관계된 문서를 수집하는 일이었는데, 특히 바그너가 주고받은 서한들을 모으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녀는 6,000여 점에 달하는 바그너와 관련된 서한을 수집했습니다. 그중에는 루트비히 2세의 약혼녀였던 소피 샤를로테 공작부인이 보낸 편지와 니체가 보낸 1875년 5월 24일자 편지도 있습니다.

코지마의 지도 아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1886년 재개되었고 이때 그녀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직접 연출했습니다. 1901년에는 바그너의 원래 의도를 쫓아 1~3막이 막간 없이 공연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으로 그녀의 명성은 확고하게 다져졌습니다. 정말이지 코지마 또한 바그너와 마찬가지로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이 많았습니다. 1906년 코지마는 외아들 지크프리드에게 총감독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고, 24년을 더 산 뒤에 1930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하늘에서 바그너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유업을 모두 정리하고 오느라 이리 늦었어요.”

* 바이로이트 축제는 코지마를 거쳐 외아들 지크프리드에게 이어졌지만, 1930년 어머니 코지마가 죽은 지 겨우 몇 달 후에 역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는 바그너의 손자 볼프강 바그너가 총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2008년 4월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 기념작으로 한국 초연되는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증손녀 카타리나 바그너가 연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파르지팔」은 1877~1882년에 작곡되었으며, 1882년 독일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초연됐습니다. 순진하고 용감한 성배 수호기사 파르지팔이 마법사에게 빼앗긴 창을 되찾아 왕이 된다는 줄거리를 중세 신화와 종교에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10월] 학원 운영 노하우

레슨 1. 이런 선생님이 필요해요!

첫 번째 : 존경받는 선생님

환경은 어린아이들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교육환경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생님의 역할은 학생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며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나의 경우, 개인 레슨의 형태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피아노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기라 피아노에 대해 함께 나눌 친구도 적었기 때문에, 엄마 몰래 레슨을 빠지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기도 했었다. 나의 첫 레슨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분이었는데, 굉장히 엄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 분이 해준 충고는 내가 그렇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피아노를 끊지 않고 계속 배우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아노는 단기간 내에 쉽게 완성할 수 있는 악기가 아니다. 잘 연주하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 배워나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 하기 싫다고 해서 그만둬 버리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비록 전공을 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해야 좋을 것이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어린 나에게 깊게 남았다.

마지못해 억지로 시작한 피아노 레슨은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계속되었고, 하다 보니 스스로 좋아지게 되었다. 그래서결국 전공까지 하게 되었다. 만약 이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쉽게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렇듯 선생님의 역할은 한 학생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중요했다.

피아노를 지도함으로써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며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참 보람된 일이다. 피아노 교육은 어린이들의 성격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인성교육이기도 하다. 지금 피아노를 배우는 모든 어린이들이 앞으로 피아노를 전공하길 바라는 것이 모든 선생님의 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또는 학과 공부를 위하여 피아노를 초, 중급 단계에서 그만둬 버린다면 이후에 악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배웠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 피아노 연주를 취미로 즐기려면 중급을 모두 마치고 고급 수준을 맛보아야만 한다.

가끔은 아이들에게나 학부모에게 진지하게 피아노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를 해주고 아무리 바빠도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격려하며 나아가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같은 과정을 겪었기에 피아노 교사는 학생들에게 좋은 상담자가 되어 줄 수 있다. 어린 학생들이 아무것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음악을 포기하지 않도록, 옳은 신념을 강하게 지켜 나가며 학생들을 위해 진심의 충고를 해주는 교사는 두고두고 존경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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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예솔특강

c43084_500무지개상자 음악이론 (선율/리듬/화성&표현기호)
정상경, 이주연 지음│각 120, 112, 104면│각 6,000원

‘음악 체험으로 익히는 음악이론!’
[리듬], [선율], [화성 & 표현기호] 총 세 권으로 선보이는 『무지개상자 음악이론』은 음악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이 게임, 생활 속의 소리를 접목한 이론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이론을 익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자칫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 있는 음악 이론을 『무지개상자 음악이론』은 단순히 음악 공부가 아닌 ‘음악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기, 색칠하기, 따라 읽기, 노래 부르기, 악기 연주하기, 이야기 나누기, 찾기, 게임하기 등 다양한 공감각 활동, 다양한 장르의 곡에 대한 분석과 연주, 음악이론을 활용한 창작 활동 등 예술적 감각과 창의성을 함께 성장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차례>

[선율]

  • 높은음자리
  • 낮은음자리
  • 장음계와 임시표 샵 ‘#’
  • 장음계와 임시표 플랫 ‘♭’
  • 단음계와 나란한 조

[리듬]

  • 4분음표, 2분음표, 온음표 / 2. 점2분음표 / 3. 마디와 세로줄 / 4. 4분쉼표, 2분쉼표, 온쉼표 / 5. 박자Ⅰ
  • 8분음표 / 7. 박자Ⅱ / 8. 붙임줄 / 9. 점4분음표 / 10. 8분쉼표 / 11. 박자Ⅲ / 12. 못갖춘마디 / 13. 음표와 쉼표 관계Ⅰ / 14. 당김음 / 15. 셋잇단음표 / 16. 박자Ⅳ / 17. 16분음표 / 18. 점8분음표 / 19. 16분쉼표 / 20. 음표와 쉼표 관계Ⅱ

[화성&표현기호]

  • 음정
  • 화음
  • 피아노와 포르테 / 메조피아노와 메조포르테 /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 / 디미누엔도와 크레센도 / 셈여림
  • 빠르기말 / 리타르단도, 아첼레란도, 아 템포 / 스타카토, 레가토 / 도돌이표 / 여러 가지 표현기호

 

아래는 [선율]편에 있는 장음계와 임시표 샵(#)’에 관한 내용입니다. 친절하고 쉬운 설명으로 장음계를 익히고 주어진 문제도 함께 풀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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