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음악 탐구

두 친구, 쇼팽과 리스트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           Franz von Liszt, 1811~1886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마음, 피아노의 넋이다.

- 안톤 루빈스타인

 

  • 쇼팽의 발라드 제1번 사단조

쇼팽의 발라드 제1번 사단조 op.23은 2003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The Pianist’에 삽입된 곡입니다. 자신만의 은신처에서 허기와 추위, 고독과 공포 속에서 끈질기게 생존을 이어가던 폴란드 유대인 스필만은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에게 발각됩니다. 스필만에게 신분을 대라고 요구하자 스필만은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합니다. 한동안의 침묵 후에 스필만에게 연주를 명령하는 독일군 장교, 그리고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순간, 스필만은 온 영혼을 손끝에 실어 연주를 합니다.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이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Chopin Ballade No.1 in g minor, Op.23

  • 서로 존경한 두 친구, 쇼팽과 리스트

폴란드 출신의 쇼팽과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거장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사랑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파리에서 쇼팽과 리스트는 친하게 지냈습니다. 리스트는 쇼팽과는 정반대로 격정적인 면을 가진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빼어난 용모로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쇼팽은 리스트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 연습곡 제10번을 헌정했고, 리스트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감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리스트는 쇼팽에 관한 전기 『쇼팽전』을 남겼습니다.

  • 쇼팽과 조르주 상드, 만남과 헤어짐의 진실

1836년 가을, 쇼팽은 파리의 한 살롱에서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의 소개로, 남장(男裝)을 하고 또 남자의 이름을 가진 6년 연상의 남작부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를 만났습니다. 상드는 “일부일처제는 막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당대의 유명한 페미니스트이자 문인이었으며 이미 많은 유명 인사들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상드는 연하인 쇼팽의 인간성과 음악에 금세 매료됐고, 드디어 쇼팽을 또 한 명의 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쇼팽은 처음에는 상드의 자유분방한 행동과 남성 편력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지만, 4년간 상드와 동거하면서 많은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러나 나날이 쇠약해지는 쇼팽의 건강과 그녀의 복잡한 가족 관계, 그리고 쇼팽을 격분시키는 그녀의 소설은 결국 파리 사교계에서 화젯거리였던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맙니다.

상드의 격렬한 욕정이 병약한 쇼팽을 괴롭혀 쇼팽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두 사람이 애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처음 만났을 당시 짧은 기간 동안 뿐이었습니다. 상드의 정열은 곧 헌신적인 모성애로 바뀌어 결핵을 앓고 있는 쇼팽에게 창작에 매진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쇼팽과 상드는 1년 중 거의 반년을 프랑스 중부에 있는 상드의 고향집 노앙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조용한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해질 무렵이면 쇼팽은 상드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고, 평화로운 환경과 상드의 애정에 힘입어 쇼팽은 이 시기에 가장 많은 곡을 썼습니다. 쇼팽과 상드는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상드는 쇼팽이 타계한 후에도 27년을 더 살았고, 자서전 『내 생애의 역사』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실 쇼팽이 매달리지 말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만약 헤어지면 실망한 나머지 죽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의 청을 받아들여 동정심에서 그를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펴주었다.”

이 대목으로 인해 당시 한편에서는 상드가 위선자라는 말이 나왔고, 한편에선 상드가
오히려 희생자라며 쇼팽을 비난했습니다.

Chopin Barcarolle in f-sharp Major, Op.60

  • 쇼팽의 최후

1846년 쇼팽은 9년에 걸친 조르주 상드와의 동거생활을 청산합니다. 상드를 떠나면서 쇼팽의 폐결핵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9년 전, 상드를 만났을 당시에 이미 폐결핵 증세를 보이고 있던 쇼팽이 그때까지 숨을 거두지 않았던 것은 연인인 동시에 어머니와도 같은 상드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이었습니다. 19세기 당시에 폐결핵은 아무런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쇼팽의 어머니도 쇼팽이 어린 시절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1849년 초, 쇼팽은 제자인 스털링 양의 초대를 받아들여 스코틀랜드로 갔습니다. 그러나 폐결핵 환자가 어둡고 습한 스코틀랜드의 기후에서 지낸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여서 급히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쇼팽이 숨을 거둘 당시, 방돔 광장 12번지에는 그의 임종을 지키려는 귀부인들이 몰려들어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1849년 10월 17일 39세의 쇼팽은 숨을 거둡니다. 마지막으로 “마토카! 모이아 비엔나 마토카!”라고 소리쳤다고 하는데, 그 뜻은 폴란드 말로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Chopin Prelude Op.28 No.4

  • 파리지앵을 매혹시킨 프란츠 리스트

리스트는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6세 때부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웠습니다. 1823년 리스트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의 고용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어린 리스트를 음악공부를 위해 빈으로 보냈는데, 리스트는 빈에서 살리에리와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831년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그는 파가니니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하고 하루에 10시간씩 맹렬한 연습을 했으며, 결국 리스트의 화려하고 열광적인 연주는 파리 시민들을 매혹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리스트는 당시 세계 음악의 거장들, 예컨대 쇼팽, 베를리오즈, 슈만, 바그너 등과 친구가 되었으며 1842년 이후 리스트의 연주는 전 유럽을 열광케 했습니다. 특히 여성 팬들은 연주 후 리스트의 장갑과 손수건을 서로 빼앗기 위해 난장판을 벌였다고 합니다.

Liszt Paganini Etude No.6

 

  • 리스트의 애인이자 코지마의 어머니, 마리 다구

1833년 22세의 리스트는 6년 연상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1876) 백작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다구 백작부인은 자녀를 둔 유부녀였으며 남자 이름(Daniel Stern)으로 문필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구 백작부인이 젊은 리스트를 쫓아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같이 리스트의 집으로 들어가자 세상은 리스트가 유부녀를 유혹한 것으로 알고 비난했습니다. 사실은 젊고 순진한 한 청년이 농락당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리스트와 다구 백작부인의 사랑은 사회 변화의 한 결과였습니다. 1840년의 7월혁명의 결과, 프랑스에서 절대왕권을 물리치고 민주적 왕위제도를 수립하고 귀족과 서민 사이에, 그리고 남녀 사이에 평등한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코지마(Cosima, 1837~1930) 등 세 자녀를 둔 그들의 사랑은 5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다구 백작부인은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리스트의 작곡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다고 합니다.

Liszt Hungarian Rhapsody No.2

 

  • 연주자와 기부자의 만남

리스트는 폭발적인 인기와 최고의 출연료에 도취되지 않고 작곡을 계속했으며 문학과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많은 글도 썼습니다. 리스트는 뛰어난 음악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업료도 받지 않고 400명이 넘는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유럽에서 큰 재해가 발생할 때 마다 자선콘서트를 열어 이재민들을 도왔고, 베토벤의 동상건립기금을 제공하는 등 덕망이 높았습니다.

어느 자선연주회 때 한 여성이 거금을 희사했는데, 그녀가 바로 리스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연인인 러시아의 카롤린 공주(Princess Carloyne Sayn-Wittgenstein)였습니다. 1847년 두 사람은 연주자와 기부자 사이로 만났습니다. 그녀 역시 문필가였으며 딸이 있었으나 남편과 별거하고 있었습니다. 카롤린 공주가 러시아를 떠나 독일의 바이마르로 이사를 하면서 리스트를 초청했습니다.

리스트는 카롤린과 함께 머물면서 피아노 연주활동은 중단하고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 일을 맡으면서 작곡과 피아노 교육에만 전념했습니다. 1857년 제자들 중 한 명인 뷜로는 스승의 딸 코지마와 결혼을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코지마는 나중에 뷜로와 헤어지고 1870년 바그너와 재혼을 했습니다. 바그너는 57세, 코지마는 33세였습니다.

Liszt - Années de Pèlerinage; Sonetto 104 del Petrarca

 

  • 그리고 사랑보다 귀한 것

1860년, 49세인 리스트는 카롤린 공주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교황의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사랑보다는 신앙을 택해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1886년 리스트는 바그너가 사망한 후 딸 코지마가 주관하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가했다가 폐렴으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로마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카롤린 공주는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Liszt Ballde No.2 S.171 b mi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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