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음악 탐구

이탈리아 오페라를 완성한 베르디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中

Giuseppe Verdi,
1813~1901


우리는 모두 이 올림푸스 신과 같은 노년의 빛을 쬐고 있었던 것이다
.

- 보이토 (베르디에 대한 조사)

 

 

주세페 베르디의 최고 걸작은 음악이 아니었다

1876년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실을 베끼는 것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다.”

베르디는 19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바그너와는 다른 새로운 형식의 음악극을 창조하려 애썼습니다. 이탈리아 음악 선조들의 전통 안에서 작곡하려 했고, 오랜 작곡 생활을 통해 그의 작곡 기법은 점점 더 유려해졌고, 개성은 훨씬 더 유연하고 표현력이 강했으며, 멜로디와 가사와의 연계도 점점 더 절제되었습니다. 그의 걸작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1887)와 「팔스타프」(1893) 등으로 그가 70~80대에 쓴 곡들입니다. 어쨌든 그의 모든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오페라 무대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1898년 마지막 작품 「테 데움 Te Deum」*과 성모애가가 포함된 「네 개의 성가곡」을 작곡했을 즈음 베르디는 이미 그의 사랑하는 두 번째 아내를 잃었고, 자신도 80세가 넘어 노쇠해져 있었습니다. 베르디는 말년에 작곡과 연주 수입으로 부자가 되었는데, 밀라노에 은퇴 음악가를 위한 경로당 ‘안식의 집 Casa di Riposo’을 건설하여 시에 기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베르디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작품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마음에 듭니까?”

베르디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작품은 다 마음에 듭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밀라노에 지은 Casa di Riposo입니다.”

 

* ‘테 데움’은 ‘테 데움 라우다무스 Te Deum laudamus’라고도 하며, 라틴어로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라틴어 찬송가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로 불린 이 찬송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례를 받을 때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창하면서 즉흥적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Te Deum - Giuseppe Verdi

 

에피소드 1

어느 날 오전, 베르디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트롬본 주자가 박자를 놓치자, 베르디가 연주를 중단시키고 그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트롬본 주자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졸았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전 너무 일에 지쳐 있습니다.”

“이유가 뭐요?”

“저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어서 과외로 돈을 더 벌어야 합니다. 그래서 낮 12시부터 3시까지는 학생들에게 레슨을 하고, 그 다음 오후 7시까지 카페에서 연주를 하고, 저녁에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다음엔 음식점 종업원 노릇을 합니다. 그리고 연이어 호텔에서 밤늦도록 문지기 노릇을 합니다.”

“그럼 도대체 잠은 언제 자나?”

“지금과 같이 오페라 연습 때인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에요.”

 

에피소드 2

어떤 점잖은 사람이 거리에서 만난 베르디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베르디가 귀찮아서 거절할 태세를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사나이가 지나가는 거지에게 1천 리라짜리 지폐를 주었습니다. 원래 시골스럽고 너그러운 베르디는 그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그 사나이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신분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에 당황한 베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작 정도면 거지에게 2천 리라 정도는 주어도 될 텐데.”

 

 

에피소드 3

1887년 7월 5일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베르디의 「오셀로」가 초연되었습니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그 당시 갓 스무 살이었지만, 이미 이탈리아에서 그 명성이 대단했는데, 스스로 첼로를 들고 오케스트라 박스로 들어가 첼로 파트에 참여해서 이 위대한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때 베르디는 74세였습니다.

 

☞“ Credo in un Dio crudel “ Otello -Giuseppe Verdi

 

피터 드러커에게 완벽의 의미를 되새겨준 팔스타프

1893년 어느 날 「팔스타프」 작곡에 한창 몰두하고 있는 베르디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미 유명인이 된 선생님이, 그리고 나이 80세 왜 또 힘들게 오페라를 작곡하십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벅찬 주제에 대해 말입니다.”

베르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음악가로서 나는 일생동안 완벽을 추구해왔다. 완벽하게 작곡하려 했지만, 곡이 끝날 때면 늘 아쉬움이 남았다. 분명 나는 한 번 더 도전해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1871년 베르디가 대작 「아이다」를 발표했을 때 그는 이미 58세였고, 그 뒤로 오랫동안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페라 팬들은 「아이다」가 베르디 최후의 걸작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르디의 최후의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는 「아이다」를 작곡한 지 22년 만에 탄생한 작품입니다. 「팔스타프」를 작곡할 때는 생계, 명성, 인기, 흥행 등 그 무엇에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베르디는 자유로웠습니다. 베르디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팔스타프」를 작곡하는 동안 나는 정말 행복했다. 수공업자가 의뢰인에게 내 줄 작품이 아니라 자기 집에 두고 바라보며 즐길 애장품을 제작하는 기분이었다.”

80세의 노인 베르디가 「팔스타프」를 작곡한 것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사람은 꼭 생계와 부, 그리고 권력과 명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팔스타프」를 작곡하도록 부추긴 사람은 베르디의 절친한 친구이자 대본가였던 보이토(Arrigo Boito, 1842~1918)였지만, 정말이지 작곡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한 사람은 로시니의 비판이었습니다. 「세비야의 이발사」 등으로 베르디 이전에 한껏 이름을 날렸던 로시니는 언젠가 잡지에 베르디의 능력을 무시하는 비평의 글을 썼습니다.

“나는 베르디의 음악적 역량을 대단히 존경하지만, 본질적으로 우울하고 심각한 성향을 지닌 베르디가 과연 희극 오페라를 작곡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 글을 본 베르디는 언젠가 희극 오페라를 작곡해 보이리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피터 드러커가 베르디의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를 관람하고 또 베르디의 말, 즉 “나는 한 번 더 도전해볼 의무가 있다”는 구절을 접한 것은 그가 함부르크의 무역회사에서 견습사원으로 있던 1927년, 겨우 18세 때였습니다. 그후 드러커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간에 “완벽을 기하기 위한 노력”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베르디의 말 한 마디는 피터 드러커가 현대경영학의 아버지가 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G. VERDI- Falstaff - Tutto nel mondo è burla

 

후원자 바레치와 그의 딸

베르디는 1813년 10월 10일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 공국의 작은 도시 부세토(Busseto)에서 약 3km 떨어진 작은 마을 론콜레(Le Roncole)에서 태어났는데, 현재의 지명은 그를 기념하여 론콜레 베르디(Roncole Verdi)로 바뀌었습니다. 론콜레는 ‘낫’을 뜻하는 론콜라(roncola)의 복수형으로 그가 태어난 곳이 시골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의 치하에 있었는데,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그 이름이 유명해진 요제프 라데츠키(Joseph Radetzky, 1766~1858) 장군이 1814년 1월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끌고 론콜레 마을로 진격하여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시켰습니다. 한 살 먹은 베르디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마을 중앙에 있는 성 미카엘 교회의 종루 밀실로 피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재난을 면했다고 합니다.

베르디는 론콜레의 성당 오르가니스트로부터 음악을 배웠고, 그가 죽자 성당의 오르간을 몇 년 동안 연주했습니다. 베르디의 부친은 베르디를 가까운 도시 부세토에 있는 중학교로 보냈는데, 운 좋게도 부세토음악협회를 공동으로 창설한, 양조장과 가게를 운영하는 안토니오 바레치(Antonio Barezzi)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르디의 능력을 간파한 바레치는 자신의 집에서 딸 마르게리타(Margherita)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기거하도록 하며 베르디를 후원했습니다. 베르디에게 바레치는 제2의 아버지였습니다. 대학에 갈 돈이 없었던 베르디가 부세토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바레치가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르디, 자네는 밭일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야.”

 

인간적 고통을 극복케 해준 나부코

베르디가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한 것은 인생의 쓰라린 고통을 겪은 후였습니다. 1838년 부세토에서 베르디의 갓난 딸이 죽었습니다. 1839년 밀라노로 이주한 뒤에는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다음해 1840년에는 후원자 바레치의 딸이자 동갑내기 아내 마르게리타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겨우 20대 후반에 딸과 아들, 그리고 아내가 차례로 죽는 것을 보고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베르디를 일찍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밀라노에서 참담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베르디는 스칼라극장 흥행사 메렐리(Bartolomeo Mereli)와 마주쳤습니다. 이미 그에게 의뢰받은 작품 진행이 지지부진해 있던 터라 난처한 지경에 부딪힌 베르디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 심정의 베르디에게 메렐리는 대본을 하나 더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용을 훑어보고 괜찮으면 곡을 붙여주게.”

집에 돌아온 베르디는 “세상이 이 모양인데, 무슨 곡을 붙여”라고 푸념하면서 그 대본을 책상 위에 내팽개쳤습니다. 흩어진 대본 중 문득 한 줄의 시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라, 마음이여, 황금의 날개를 타고 Va pensiero, sull’ali dorate!” 이 한 구절이 베르디의 천재성을 다시 일깨웠습니다. 베르디의 가슴에 악상이 마구 흘러 넘쳤습니다. 베르디는 그날 밤부터 구약성서 예레미아 52장에 등장하는 바빌론유수(Babylonian Captivity) 이야기, 즉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유대인들을 노예로 끌고 간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의 폭정과 바빌로니아에 유폐된 유대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나부코 Nabucco」의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웅장한 스타일에 합창을 자주 사용하는 베르디의 성향에 꼭 맞았기 때문에 작품은 단숨에 완성되었습니다.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 강력한 합창과 정열적인 아리아가 객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조국을 잃은 유대인들의 비탄은 오스트리아에 억압당하던 이탈리아의 현실과 겹쳐졌습니다. 「나부코」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쌓인 민족 감정에 불을 붙이는 불씨였습니다.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사슬에 묶인 채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유대인의 무리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가라, 마음이여, 황금의 날개를 타고”라고 합창을 시작하자, 이 장면을 보는 객석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길거리에는 ‘노예들의 합창’이 넘쳤습니다.

 

☞Nabucco - Va Pensiero -Giuseppe Verdi

 

비바 베르디

베르디의 오페라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 정세와 무의식적으로 연관되었고, 왕정제 통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베르디(Verdi)라고 하는 이름의 철자는 Vittorio Emanuele re d’ Italia(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머리글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오페라가 끝난 후 청중이 “베르디 만세(Viva Verdi)”라고 환호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외적을 몰아내고 통일왕국을 이룩하자는 구호가 되었습니다. 1859년 2월 로마에서 초연된 「가면무도회」에서는 관객이 몇 번이나 의도적으로 “베르디 만세”를 외쳤고, 관리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베르디는 26편의 오페라를 남겼는데, 작곡료는 1849년 「루이자 밀러」의 경우 2,500달러였지만, 차츰 인기가 높아지면서 작곡료가 상승하여 1871년 「아이다」는 30,000달러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베르디는 말년에 상당한 갑부가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휴식의 집’이라는 뜻의 ‘Casa di Riposo’는 베르디가 자신의 작품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밀라노에 지은 은퇴 음악인들을 위한 양로원의 이름입니다.

1897년 두 번째 아내 주세피나도 떠나보낸 베르디는 건강이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창작 능력은 떨어지지 않아서, 자신을 오래도록 지켜준 하나님에게 바치는 「코러스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4개의 성가」를 1898년 85세에 작곡했습니다. 1901년 1월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 청소를 하러 온 종업원이 의식을 잃고 침대에 쓰러져 있는 베르디를 발견했습니다. 베르디는 88세의 생을 그렇게 마감했습니다.

1월 30일, 베르디의 시신이 담긴 관이 밀라노의 거리를 지날 때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8백 20명의 합창단은 “가라, 마음이여, 황금의 날개를 타고”를 구슬프게 불렀고, 수많은 시민들이 장례행렬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습니다. 베르디는 자신이 세운 ‘Casa di Riposo’에 누워 있습니다.

시골 농부 모습의 베르디는 말년에 한적한 이곳에서 밭일에 열중하면서 종종 “나는 농부였어, 지금도 나는 농부일세,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농부일걸세”라고 읊조렸다고 합니다. 그의 고향 부세토에 가끔 가을바람이 휘몰아칠 때 흩날리는 낙엽 소리는 사라져버린 ‘백발의 농부’의 음악처럼 들려온다고 합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라 트라비아타

바그너에게 코지마가 있었다면, 베르디에게는 주세피나가 있었습니다. 베르디와 관련된 도시인 부세토에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거리(Via Giuseppina Strepponi)가 있습니다.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 1815~1897)는 베르디의 두 번째 아내입니다. 주세피나는 1839년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에서 엘비라 역으로 라 스칼라극장에 데뷔한 이래 맑고 고운 목소리, 뛰어난 음악성과 연기력으로 여러 오페라 극장에서 출연 요청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는 곧 풀이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주세피나는 밀라노 근교 몬차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무대라도 서게 되었고, 게다가 함께 자주 무대에 섰던 테너 모리아니와의 불륜 관계에서 두 명의 아이를 낳는 바람에 목소리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첫 번째 오페라 「오베르토」의 초연에 출연할 계획이었으나 앞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출연을 포기했습니다. 또 주세피나는 도니체티와도 애정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도니체티는 1841년 그녀에게 「아델리아」의 주역을 맡긴 적도 있습니다.

1842년 스트레포니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의 초연에서 아비가일레 역을 맡았는데, 무대에 서기 직전에 의사들은 노래를 계속 부르면 폐결핵 증세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그녀는 무려 여덟 번째 공연까지 해냈습니다. 그후에도 몇 편의 베르디 오페라에 출연했지만 건강이 나빠져 결국 1846년에 은퇴하고 파리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주세피나는 성악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중, 1847년 파리를 방문한 베르디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해 결국 동거하게 됩니다.

베르디는 파리에서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er Dumas Fils, 1824~1895,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동백꽃 여인』(춘희)을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소설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인데,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벗어난 여인’이란 뜻입니다. 베르디는 자신의 이야기가 이 오페라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처럼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은 바레치의 모습과 흡사했고 비운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바로 주세피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르디와 주세피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으나, 두 사람의 깊은 애정은 1897년 주세피나가 먼저 신의 부름을 받기까지 3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G.verdi La Traviata- Libiamo, ne'li cali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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