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음악탐구

성자 같이 살다 간 브루크너 - ①
- CEO를 위한 클래식 작곡가 에피소드

 

Anton Josef Bruckner(1824~1896)

말러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은 작곡가이다.

- 브루노 발터

 

 

  • 사후에 더욱 높이 평가받는 브루크너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Anton Josef Bruckner, 1824~1896)는 동시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세자르 프랑크와 여러 모로 닮았습니다. 작곡가 사후에 한층 더 높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프랑크와 브루크너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브루크너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Schlesinger, 1876~1962)는 브루크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러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은 작곡가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하면서 자신을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오르간 밑에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주님의 성전에 묻히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루크너의 미완성 교향곡 제9번 악보 첫 페이지에는 ‘사랑하는 하느님에게’라고 적혀 있습니다.

 

Bruckner Symphony No. 9

 

* 부천 필하모닉 지휘자 임헌정은 2007년 9월 브루크너 전곡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브루크너의 묘소를 찾아서 신고를 했습니다. 임헌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음악은 상상력에서 태어나는데, 상상력은 인간의 중요한 특권이다. 조용히 성당에 앉아 있으니 마치 그의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

 

 

  • 늦게 출발했지만 더 멀리 나아간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는 세계 주요 국가에 브루크너협회가 생길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생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브루크너는 중국 사람의 행동이 느리다는 것을 의미할 때 쓰는 말, 즉 만만디(慢慢地)라는 단어가 꼭 어울리는 음악가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벽촌 안스펠덴(Ansfelden)에서 학교 교사 겸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곧 장크트 플로리안(St. Florian) 수도원 아동합창대원이 되었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음악을 본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은 것은 1851년 27세 때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가 되면서부터였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브루크너는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수도원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서 하나님에게 봉사했습니다. 교향곡이나 작곡법을 배우려고 제히터(Simon Sechter, 1788~1867) 선생을 찾아간 것도 그로부터 10년 뒤인 37세 때였습니다. 빈의 음악원 강사를 시작한 것은 1868년 44세 때였습니다.

1871년, 늦게 출발했지만 성실했던 브루크너는 47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열린 국제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등의 영광을 차지함으로써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1875년 브루크너는 51세에 빈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빈에서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리스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빈의 음악계는 브람스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 바그너를 따르는 진보파로 나뉘어 음악적 패권을 다투고 있었는데,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 1825~1904)라는 뛰어난 평론가가 보수파에 가담하여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고 있어서 브루크너는 음악적으로 별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바그너를 따르는 음악가 중에는 오만한 악동 후고 볼프까지 있어서 겸손한 브루크너도 도매금으로 한슬리크의 악평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루크너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지만 반 바그너주의자들의 반대와 적개심에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그의 교향곡이 “연주 불가”라며 거부하거나 일부러 연주를 망쳐버렸고, 영향력 있는 비평가이자 브람스 애호가인 한슬리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어떻게든 폄하하려 애썼습니다. 특히 교향곡 제3번은 브루크너가 자신의 영웅을 찬미하려는 열정적 의도로 현명치 못하게 ‘바그너 교향곡’이라고 이름 붙이는 바람에 더 신랄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브루크너는 인격적으로 매우 겸손하고 점잖았지만, 음악가 브루크너는 진보파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 1855~1922)와 프란츠 샬크(Franz Schalk, 1863~1931)가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공개 무대에 자주 올려 연주했습니다.

 

  • 브루크너의 「0번 교향곡」

브루크너는 자기 자신의 작품들을 매우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의 교향곡 가운데는 작품번호 0번이 있습니다. 연유는 이렇습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작품번호를 제1번부터 제9번까지 붙였는데, 어느 날 제1번보다 먼저 습작처럼 썼던 교향곡 악보를 서랍에서 발견했습니다. 다시 보니 그 작품도 괜찮다 싶어 그것을 1번으로 하려고 작정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미 통용되고 있는 작품번호가 하나씩 뒤로 밀려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제0번이라는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작품번호가 생겼습니다.

1863년 39세에 작곡된 이 작품은 「Study Symphony in f minor」라고도 하고 「Symphony No.00 in f minor」라고도 하는데, 브루크너가 사망한 지 28년이 지난 후인 1924년 초연되었습니다. 생전에는 그의 많은 교향곡들을 어느 악단도 연주해주지 않아서 브루크너 자신도 실제 공연을 직접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베토벤과 브람스에 이어 독일 교향악의 전통을 이어간 브루크너이지만, 브루크너의 작품들마다 여러 편의 판본이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브루크너가 워낙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고 또 귀가 얇아 친구들이 개작을 제안하면 자신의 교향곡 악보를 쉽게 고치거나 부분적으로 삭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작품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뒤섞인 채 전해집니다.

Bruckner - Symphony in F (No.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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